'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55

  1. 2020.05.12 언제나 행복한 하루 중량천 자전거 나들이
  2. 2012.12.13 “시작 버튼 돌려줘” 데스크톱 유저 위한 윈도우8 가이드 3
  3. 2011.07.23 지하철 역명 유래
  4. 2009.04.02 화계사 주지 수경 스님 3월 28일부터 오체투지 순례 / 뭇 삶 아픔 껴안고 온몸 던지다
  5. 2009.02.27 MS-애플의 성장 뒤에 숨겨진 “불편한 진실”
  6. 2009.02.13 [60년째 제자리 한국 철도]
  7. 2008.12.08 [T옴니아 와이드 리뷰] 똑똑하고 쓰기 쉽고…생각대로 다 된다
  8. 2008.12.05 독하게 독학한 제2의 미네르바들
  9. 2008.12.01 가상화 도입! 비싸잖아? 모르는 소리
  10. 2008.11.30 전통주를 찾아서
  11. 2008.11.17 공중파 업은 IPTV, 방송계 '핵폭탄' 될까
  12. 2008.11.12 [포토] 쓸 만한 '프리 SW' 10선
  13. 2008.10.30 [심재희의 골라인] FC 서울, 아스날을 닮았다!
  14. 2008.10.14 <獨 수용소서 키운 사랑..17년만에 뉴욕서 백년가약>
  15. 2008.10.10 복돌이 2
  16. 2008.10.06 신민아의 우아한모습 2
  17. 2008.10.03 만추(滿秋) 1
  18. 2008.10.01 그레고리 존 리처드 콜버트의 작품들
  19. 2008.09.27 과꽃
  20. 2008.09.27 Don McCrae 3
  21. 2008.09.27 Don McCrae 2
  22. 2008.09.26 Don McCrae 1
  23. 2008.09.25 도올의 포효... 가슴이 저립니다

언제나 행복한 하루 중량천 자전거 나들이

언제나 행복한 하루

“시작 버튼 돌려줘” 데스크톱 유저 위한 윈도우8 가이드

“시작 버튼 돌려줘” 데스크톱 유저 위한 윈도우8 가이드


윈도우 8이 지난 10월 26일 출시됐으니 한 달이 조금 넘었다.

제 2의 윈도우XP가 될까? 비스타가 될까? ‘기대반 우려반’이지만 일단 수치로 보면 순항중인 듯 하다.

 

MS는 고전을 면치 못했던 윈도우 비스타와는 달리 출시 후 3일 동안 400만 카피, 한달 동안 4000만 카피를 판매했다. 출시 3주만에 점유율 1%를 넘어섰다. 비관적으로 볼만한 시작은 아니다. 썰렁했던 윈도우 스토어 앱도 11월 20일 기준으로 2만개를 돌파했다.

 

하지만 사용자 사이에서는 호불호가 확연히 갈라지고 있다. “윈도우 7보다 뛰어나게 나아진 것도 없이 불편한 것만 한 가득이다“라고 불평을 털어놓는가 하면, ”제대로 써보고 평가하라“며 하나 둘 드러나는 윈도우 8의 매력에 푹 빠지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구동성으로 내뱉는 말 한마디가 있으니 ‘터치에 최적화된 OS’라는 것. 부팅하자마자 화면을 가득 채우는 타일 모양의 버튼은 터치 모니터가 아님에도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화면으로 가져가게 만든다. 이 때문인지 윈도우 8을 품고 쏟아져 나오는 PC는 터치 기반의 태블릿, 올인원PC 뿐이다.

 

그동안 터치가 아닌, 마우스로 마음껏 모니터를 누볐던 이들에게 윈도우 8은 그냥 빛 좋은 개살구는 아닐까? 지극히 평범한 데스크톱PC와 노트북을 쓰고 있는 기존 사용자에게 있어 윈도우 8은 과연 어떤 운영체제인지, 비(非)터치 기반 PC에서 윈도우 8의 활용 노하우를 들여다본다.

 

▲ 부팅하면 먼저 만나게 되는 터치 기반의 윈도우 8 UI

 

 

윈도우 8 UI에서 키보드와 친해지기

 

터치 기능도 없는 내 PC에서 윈도우 8을 제대로 쓸 수 있을까? PC를 켜면 곧 나타나는 타일로 구성된 새 시작화면을 보고 있으면 터치하지 않고 키보드와 마우스만으로 어찌 조작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하지만 MS는 키보드와 마우스만으로도 충분히 윈도우 8 UI 쓸 수 있도록 단축키를 비롯한 다양한 조작 방법을 제공한다. 또는 화면 좌측 하단으로 마우스를 이동시키면 작은 시작 화면이 보이며, 클릭하면 시작화면으로 이동한다.

 

▲ 윈도우 8에서는 윈도우 키가 더욱 위력을 발휘

 

◆ 달라진 윈도우 키

 

시작 메뉴가 없어졌으니 아무리 눌러도 프로그램 목록이 위로 쭉 펼쳐지는 창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대신 윈도우 8 시작 화면이 나타난다. 한 번 더 누르면 마지막으로 실행했던 앱이 나온다. 윈도우 8에서 가장 많이 쓸 것으로 예상되는 기능이다.

 

◆ 작업 전환과 목록 보기

 

기존 윈도우에서는 실행중인 프로그램간 전환이 필요할 때 아래 작업표시줄을 이용하거나 <Alt+Tab> 혹은 <Window+Tab> 키를 이용했다. 윈도우 8에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대로 이 키를 이용하면 된다. 또는 화면 좌측 상단으로 마우스를 이동시키면 바로 전 작업 화면이 나타나 전환할 수 있다.

 

 

 

◆ 참(Charm) 메뉴 불러내기

 

윈도우 8 UI 화면 우측에는 참 메뉴라는 것이 숨어있다. 터치를 지원하는 태블릿이라면 화면 우측 배젤 부분에서 안쪽으로 쓸어 밀면 메뉴가 바로 나오지만 키보드와 마우스만으로 참 메뉴를 어찌 불러내야할지 막막하다. 참 메뉴와 관련된 단축키는 다음과 같다. 

 

단축키

내용

<윈도우+C>

우측에 숨어 있던 참 메뉴를 연다

<윈도우+H>

참 메뉴의 공유 기능을 실행한다

<윈도우+I>

참 메뉴의 설정 기능을 실행한다

<윈도우+K>

참 메뉴의 장치 기능을 실행한다

 

또는 화면 우측 상단이나 하단 모서리로 마우스를 이동시키면 바로 참 메뉴가 나타난다.

 

 

 

◆ 고급관리도구

 

윈도우의 관리 기능을 종종 이용했던 이들에게도 윈도우 8은 참 답답한 운영체제다. 도대체 이런 것을 어디서 건드려야 할지 모를 경우 <윈도우+X>를 눌러보자. 윈도우를 마음대로 주물렀던 사용자라면 장치관리자, 디스크관리, 작업관리 등 정말 반가운 메뉴들이 화면 좌측 아래 펼쳐진다.

 

 

이전 윈도우에서는 키보드와 마우스만으로 단계 단계 찾아들어가면서 원하는 작업을 했다. 하지만 윈도우 8은 타일 구조의 UI 밑으로 잘 쓰던 메뉴나 프로그램들이 숨어버렸으니 도무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기 어려울 정도다. 이런 경우 외워 두었던 단축키가 위력을 발휘한다. 윈도우 8에서 알아두면 유용한 단축키를 소개한다.

 

단축키

내용

<윈도우+D>

데스크톱 바탕화면으로 전환한다

<윈도우+M>

모든 창을 최소화하고, 데스크톱 모드로 전환한다

<윈도우+L>

화면을 잠금 상태로 전환한다

<윈도우+J>

잠금 상태의 화면에서 로그인 상태로 전환한다

<윈도우+P>

외부 모니터를 연결했을 때 어떤 방식으로
출력할 것인지 설정할 수 있다

<윈도우+U>

제어판 내 접근성 센터를 불러낸다

<윈도우+F>

파일을 검색한다

<윈도우+Q>

설치된 앱을 찾는다. 시작 버튼이 없어 메모장 등
프로그램을 찾기가 어려울 때 이용하면 편리하다

<윈도우+E>

탐색기를 실행한다

<윈도우+O>

화면을 가로로, 세로로 자동 회전 되는 기능을
ON/OFF한다

<윈도우+R>

‘실행’ 기능을 불러낸다

<윈도우+Z>

하단의 메뉴 바를 호출한다

<윈도우+‘+’/‘-’>

돋보기 줌인/줌아웃

<윈도우+‘,’(쉼표)>

누르는 동안 데스크톱 바탕화면을 보여준다

<윈도우+‘.’(마침표)>

앱 실행 중 멀티스크린을 조정한다. 한 화면에
두 개의 앱을 동시에 볼 때 유용하다

 

 

윈도우 8 UI에서 마우스와 친해지기

 

터치가 되지 않는 PC라고 해서 윈도우 8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마우스만으로도 윈도우 8 UI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좌우로 넓게 펼쳐진 타일 이동은 그냥 마우스를 좌우로 이동시키면 된다. 이조차 귀찮다면 마우스 휠 버튼을 위아래로 굴리면 좌우로 화면 이동이 된다. 어떻게 보면 터치보다 더 편리하다.

 

원하는 앱을 실행하고자 한다면 해당 앱으로 마우스 커서를 이동시킨 후 좌측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된다.

 

우측 버튼을 누르면 해당 앱이 선택되면서 앱에 대한 속성이 나타난다. 기존 윈도우 시작 버튼을 누른 후 응용 프로그램에서 마우스 우측 버튼을 누른 것과 비슷하다. 여기서는 앱을 제거하거나 타일 크기를 조절하거나 라이브 타일 기능을 ON/OFF 할 수 있다. 여러 개의 앱을 우측 버튼으로 누르면 다중 선택이 되며, 여러 개의 앱을 동시에 시작 화면에서 제거할 수 있다.

 

▲ 마우스 우측 버튼을 눌러 앱을 선택하면 시작화면에서 제거하거나 타일 크기 조절,
라이브 기능 ON/OFF 기능을 선택할 수 있다.

 

▲ 여러 개의 앱을 선택해 시작 화면에서 일괄 삭제할 수 있다.

 

시작 화면에서 터치로 핀치투줌 액션을 주면 타일의 크기가 변하면서 한 화면에 모든 타일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키보드의 <Ctrl> 키를 누르면서 휠 버튼을 굴리면 된다.

 

 


앱 타일이 없는 곳에 마우스 커서를 두고 마우스 우측 버튼을 누르면 하단에 <앱 모두 보기>가 나타나 설치된 모든 앱을 볼 수 있다. 계산기, 메모장, 그림판 등 윈도우 보조 프로그램도 모두 여기 안에서 찾을 수 있다. 자주 사용하는 앱이라면 마우스 우측 버튼을 눌러 시작 화면에 추가할 수 있다.

 

 

 

윈도우 8을 부팅하면 잠금 화면이 맞이하는데 이 역시 터치를 고려했다. 태블릿이라면 화면 아래에서 위로 터치하면서 올리면 잠금이 풀린다. 마우스에서는 좌측 혹은 우측 버튼을 누른 후 위로 움직이면 된다. 이조차 불편하다면 그냥 휠 버튼을 아래로 돌리면 끝.

 

 

◆ ‘시작’을 되살려라

 

윈도우 8에서 시작 버튼이 사라졌다는 얘기는 이미 온 국민이 알만한 사실이다. MS는 터치 기반의 UI로 옷을 갈아입기 위해 습관적으로 쓰던 시작 버튼을 과감히 없앴다. 그러자 기존 사용자들의 불만은 바로 쏟아져 나왔다. 시작 버튼을 누르고 단계 단계 지나 원하는 프로그램을 실행시켰는데, 그게 없으니 윈도우를 10년 넘게 다룬 사용자라도 윈도우 8 앞에서는 메모장 조차도 쓰지 못하는 일이 생겼다. 

▲ 늘 있어야 할 자리에 시작 버튼이 사라졌다.

 

사실 자주 사용하는 프로그램은 대부분 바탕화면에 바로가기로 꺼내어 쓸 뿐, 검색이나 시스템 종료 등 제한된 용도로 시작버튼을 쓰고 있다. 시작버튼이 생을 마감하게 된 것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유야 어떻든 잘 쓰던 것이 없어졌으니 이용자들의 상실감은 클 수밖에. 그래서 급기야는 시작 버튼을 강제로 만들어 주는 프로그램까지 생겨났다.

 

윈도우 시작 버튼을 되살려주는 프로그램은 이미 여러 종류가 나와 있다. 그중에서도 보편적으로 활용되는 것은 ‘Classic Shell’이다. 우선 홈페이지(http://classicshell.sourceforge.net/)에서 다운로드를 한다.

 

 

 

프로그램을 내려 받은 후 실행하면 라이센스 동의와 설치 위치를 물어보는데 특별한 것은 없다. 동의 후 <Next> 버튼을 눌러 설치한다. 완료되면 눈에 익숙한 모양은 아니지만 그래도 시작 버튼이 화면 구석에 생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설치가 완료되면 시작 버튼이 생겨난다.

 

시작 버튼을 누르면 첫 설정 화면이 나타난다. 시작 메뉴 스타일을 사용자 취향에 맞게 바꿀 수 있다. 복잡하다면 그냥 ‘Basic Setting’을 고르면 된다. 윈도우 XP/7에서 보던 창이 나타난다.

 

 

 

윈도우 8 UI가 반갑지 않다면?

 

터치 기반의 디바이스가 아닌 일반 PC에서 사실 타일 모양의 시작 화면은 그다지 반갑지 않다. 시작 버튼도 되살렸으니 부팅 후 곧바로 데스크톱 화면이 나오기를 희망하는 이들도 있다. 이 경우 위에서 설치한 ‘Classic Shell’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

 

새로 생긴 시작버튼을 마우스 오른쪽 버튼으로 눌러 <설정> 창을 불러내면 된다. 여기서 [Basic Setting] 탭으로 이동, 아래쪽에 있는 <Skip Metro screen>을 체크 후 확인(OK) 버튼을 누르면, 다음 부팅 때에는 바로 데스크톱 모드로 들어간다. 

 

 

휴~ 끄는 것도 힘들어~

 

윈도우 8이 처음 공개됐을 때 상당수 사용자들은 시스템 종료 버튼이 어디 있는지 몰라 당황했다. 시작버튼을 누르면 바로 나타났던 시스템 종료 버튼 대신 참 메뉴를 불러내 [설정-전원-시스템 종료]라는 전과 비교할 수 없는 대단히 번거로운 일이 되어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터치를 기반으로 한 운영체제이다 보니 시스템을 종료한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시 약간의 꼼수를 부리면 쉽게 해결할 수 있다. 

 ▲ 몇 단계 더 거쳐야 시스템 종료가 가능해 불편하다.

 

데스크톱 화면 빈 곳에서 마우스 우측 클릭을 누른 후 [새로 만들기]-[바로 가기]를 선택한다. 그리고 입력 칸에 ‘shutdown -s’를 입력하면 바탕화면에 PC가 종료되는 단축 아이콘을 만들 수 있다. 언제든지 아이콘을 클릭하면 1분 후에 시스템이 종료된다. 바로 꺼지기를 원한다면 위 문구 대신 ‘shutdown -s -t 0’을 넣으면 된다. 종료가 아닌 재부팅을 원한다면 ‘shutdown -r -t 0’을 넣어보자.

 


 

 

이렇게 만들어진 종료 아이콘을 윈도우 8 UI 타일에 추가하면 더욱 편리하다. 바탕화면에 만든 시스템 종료 아이콘을 마우스 우측 버튼으로 클릭 후 [시작 화면에 고정]을 선택하면 시작 화면에 종료 타일이 생성된다. 

 

 

윈도우 8 UI 앱에서는 문제가 없을까?

 

윈도우 8은 기존 데스크톱과 메트로 UI라 부르는 윈도우 8 UI이 공존한다. 기존 데스크톱은 십년도 넘게 쓴 익숙한 공간이기 때문에 키보드와 마우스만으로 전혀 문제 없이 사용할 수 있다. 아니 버튼이 작다보니 오히려 터치가 더 불편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하지만 윈도우 8 UI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풀 화면으로 실행되는 윈도우 8 UI 앱은 대부분 터치를 기반으로 한다. 물론 마우스로 모두 제어가 가능하나 핀치투줌이나 회전과 같은 액션은 마우스가 터치를 따라가기 어렵다. 특히 터치를 기반으로 한 게임에서는 더욱 그렇다. 순간 반응이 필요한 게임에서는 마우스로 조작하는데 한계가 있다. 멀티 터치로 다수가 동시에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 터치를 우선적으로 고려한 게임에서는 마우스로 즐기기에 불편한 점도 있다.

 

▲ 터치 기반의 게임이라도 키보드와 마우스 조작 방식을 병행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대부분 윈도우 8을 활용하는데 있어 키보드와 마우스만으로 큰 불편은 없지만, 전적으로 터치를 기반으로 한 일부 앱에서는 조작이 불편한 점도 있다. 반대로 어떤 앱은 터치보다 마우스가 더 편리한 경우도 있다. 다행인 것은 키보드나 마우스가 고려되지 않은 앱은 스토어에서 인증을 해 주지 않는다는 것. 조금의 불편함은 있겠지만 쓰는 데는 문제가 없다.

 

 

윈도우 8, 키보드와 마우스를 몰아낼까?

 

터치를 우선으로 한 윈도우 8을 보고 있자니 이제 PC에서 키보드와 마우스는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데스크톱PC에 있어 마우스는 여전히 중요한 존재다. 비록 터치가 직관적이기는 하나 디아블로 등 게임할 때 마우스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오피스와 같은 생산성 어플리케이션에서도 터치보다는 마우스의 역할은 중요하다. 따라서 윈도우의 등장으로 마우스의 존재감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터치라는 입력 수단이 하나 더 생겨났다고 보는 것이 맞다.

 

▲ 데스크톱 환경에서 여전히 키보드와 마우스의 역할은 크다.

 

 

윈도우 8, 쓸까? 말까?

 

윈도우 8은 새로 추가된 <윈도우 8 UI>와 기존 <데스크톱>이 공존하는 운영체제다. 모바일 환경까지 고려하다보니 많은 부분이 바뀌었고, 또 이로 인해 여러 불편함도 생겨났다. 하지만 이는 수년 혹은 십수년 이상 학습된 익숙함의 문제다. 새 윈도우에 맞는 단축키와 마우스 조작법만 익힌다면 기존 윈도우와 같이 키보드와 마우스만으로 윈도우 8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 다만 데스크톱 환경에서는 그 존재성이 절대적으로 느껴지는 시작버튼과 종료 기능은 차후 업데이트시 다시 살려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많은 이들이 윈도우 8 업그레이드 때문에 고민에 빠진다. 데스크톱만 놓고 본다면 윈도우 8과 윈도우 7은 거의 차이가 없다. 따라서 윈도우 7을 이미 쓰고 있는 사용자라면 굳이 윈도우 8로 업그레이드할 이유는 없다. 윈도우 XP를 쓰고 있다면 새로운 윈도우에 적응해보기를 추천한다.

 

글 / 이준문 테크니컬라이터
기획 및 진행 / 미디어잇 홍진욱 기자 honga@it.co.kr
상품지식 전문뉴스 미디어잇


지하철 역명 유래


*지하철 역명 유래

 

1호선

역명지 명 유 래

청량리청량리는 청량161번지에 있는 사찰 청량사와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찍부터 도성사람들의 성외 피서 및 교외로 나가던곳이며 이때부터 청량동으로 불리어 지게 되었다.

제기동제기동은 조선6대 왕인 성종이 풍농을 기원하기 위해 이마을에 친경대를 만들고왕이 친히 제사를 지내던 자리 라는 데에서 동명의 기원을 두고 있다.

신설동신설동은조선중기 동부 숭신방(성외)에 새로 설치된 마을이므로 신설계좌 한테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즉 영조 27(1751)의 기록에 처음으로 신설계가 나타나고 있다.

동대문동대문은 흥인지문의 속칭으로 도성 4대문의 하나이다. 보물 제 1호로 지정된 동대문은 조선초 태조때에 세워졌지만조선말 고종때에완전히 해체하여바닥을 높인 다음에 건축한 것이다. 이문을 특별히옹성으로 쌓은 것은 이곳의 지대가 낮아 외적을 방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종로5종로는 조선왕조 500년동안 밤에는 인정, 새벽에는 파루를 쳐서 도성 8문을 여닫게 하는 종루가 있어 유래된 것이다. 이거리에는 조선초부터 시전이 있었던 번화가였으므로 일명 운종가로 칭한 서울의 중심가였다.

종로3종로는 조선왕조 500년동안 밤에는 인정, 새벽에는 파루를 쳐서 도성 8문을 여닫게 하는 종루가 있어 유래된 것이다. 이거리에는 조선초부터 시전이 있었던 번화가였으므로 일명 운종가로 칭한 서울의 중심가였다.

종각종각은 조선왕조 500년동안 밤에는 인정, 새벽에는 파루를 쳐서 도성 8문을 여닫게 하는 종루가 있었는데 보신각이라는 편액을달면서 보신각으로 유래하였고, 현재는 종각이라고시민들에게 널리알려져 있다. 3.1, 광복절, 새해를 알리는제야에 종을 쳐 우리에게희망을 주는 종으로 사랑받게 되었다.

시청시청역에위치한 태평로는1914년에 서소문동에 있던 중국사신을 맞던태평관의 이름을따서 붙인 것이다. ()의 사신이 오면 이 길을 거쳐 태평관에서 경복궁으로 들어갔다.

서울역광무4(1900)에 남대문역으로 출발한 서울역은 우리나라철도의 대표적인역으로 주요 철도의 시발점이자 종착역이다. 1923년 경성역으로 개칭되었으나 광복후 1947년에 서울역 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사적 284호로 지정된 서울역사는 1925년에 지어진 건물로 서울의 관문이다

2호선역 명지 명 유 래

시청시청역에위치한 태평로는1914년에 서소문동에 있던 중국사신을 맞던 태평관의 이름을따서 붙인 것이다. ()의 사신이 오면 이 길을 거쳐 태평관에서 경복궁으로 들어갔다.

을지로입구을지로입구역은 우리나라의 위인중의 한사람인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의 성을 따서 붙인 것이다. 조선왕조때는 구리개로 불리우던 이길은 1941년부터 황금정으로 고친적도 있다. 이곳은 을지로의 입구에 위치하였기에 을지로입구로 명명되었다.

을지로3을지로3가역은 우리나라 위인중의 한사람인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성을 따서 붙인것이다.조선왕조때는 구리개로 불리던 이길은 1914년부터 황금정(黃金町)으로 고친적도 있다. 옛날 이길은 종로만큼 번화하지는 않았으나 관공서와 시전(市廛)이 들어서 있고 가내수공업이 성한 곳이었다.

을지로4을지로4가역은 우리나라 위인중의 한사람인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성을 따서 붙인것이다.조선왕조때는 구리개로 불리던 이길은 1914년부터 황금정(黃金町)으로고친적 도 있다. 이곳은 을지로의 중심부인4가에 위치하기에 을지로 4가역으로 명명되었다.

동대문운동장동대문운동장역은 1926년에 육상경기장, 야구장, 정구장을 완공하면서 경성운동장으로 불리어 졌다. 원래육상경기장은 조선 500년간 장병들의 선발과무술훈련을 하던 훈련원 터였다. 또한 야구장은 훈련도감의군영인 하도감이 있었는데 개방후에는 별기군이라는 신식군대가 훈련을 받았다.

신당신당동은 조선시대 신당리계(新堂里契)에서 비롯된 동명으로신당(新堂)을 모신 동네라는 뜻을가지고 있다. 신당이란 무당들이 받들어 모시는 신령을 모신집을 말한다. 이일대에는 신당을중심으로 많은 무당들이 광희문 밖에 살았다고 한다.

상왕십리상왕십리동명의 유래는 조선초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도읍을 정하려고 이곳까지 와서 도선대사의 변신인 늙은 농부로부터 십리를 더 가라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왕십리라 전해오고 있다. 왕십리 윗쪽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상왕십리로 칭한 것이다.

왕십리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후 송도의 고려 도읍지를 옮기고자 당시 무학대사에게 도읍지 를 찾아보라고 명하여 무학대사는 도읍지를 찾아 남으로 내려와 왕십리에서 지형을 살피던 중 때마침 도선대사의 변신인 노인이 "십리"를 더가서 도읍지를 찾으라는 가르침을 받아 그 노인 의 말대로 현재의 왕십리에서 10리를 더가 경복궁자리에 궁궐터를 잡았다는데 그뒤부터 무학 대사가 10리를 더갔다하여 왕십리라 불렀다함.

한양대행당동의 동명은 갑오개혁(1894)때부터 불러오고 있으며 현재의 행당국민학교 동쪽산 일대에 살구나무,은행나무가 많이심어져 있어서 행당이라는 동명이생겼다고 한다. 인근에 한양대학교가 있어 한양대로 명명하였다.뚝섬성수동의지명은 한성부(漢城腐)때살꽃이들이라고 고지도(古地圖)에나타났다. 뚝섬이라 불리어오던 이곳은 옛부터 독도, 살꽃이벌이라 불리어졌고 동국여지승람에서는 동쪽에서 오는 한강이 둘러 서쪽으로흐르고,북쪽은 중량천이서쪽에서 흐르는한강과 합하는 중간에 있으므로 자연히 중앙으로 형성되어 졌다.

성수전래에 의하면 성수라는 이름은 항상 맑은 물이 흐르고 또한마을사람들이 그 물을 마실 수가 있었으며 이곳에 성덕정이라는 큰 정자가 있었는데 이곳 정자에서 선비들이 흐르는 물을 마시며풍류를 읊으며 노닐었다는 성스러운 물 즉聖水라는 지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건대입구화양동의 동()명은 70년전까지 110번지 32호에 화양정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이정자가 세워진 때는 세종14(1432)인데 이때부터 전해 내려오며 인근에 건국대학교가 있어서 건대입구역으로 명명되었다.

구의(광진구청)구의동의동명은 191441일 경기도 양주군의 아홉개의 우물이 있다고 해서 구정동이라 불리던 구정동과 산의동이 경기도 고양군으로 편입되면서''자와 ''자를 따서 구의동이 된 것이다.

강변 (동서울터미널)강변역은한강제방 축조시조성된 공한지 위에 세워진 역사로써 삼환기업()197839일에 착공하여 27개월 22일에걸친 공사끝에 19801031일을 기하여 영업개시하게 되었으며 한강변에 위치한다하여 "강변역"으로 명명하게 되었다.

성내송파구 신천동 1번지에 위치한 성내역은 역사 인근을 흐르는 성내천의 이름을 따서 성내역으로 명명 되었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잠실(송파구청)잠실은 조선초에 이곳에 잠실을 두었기 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잠실은 잠실도회의 준말로 조선초의 국립 양잠소였다.

신천신천역은 행정구역이 변경되기전에 신천동의 이름을따서 명명되었으며 송파구 잠실동에 위치하고 있다.

종합운동장종합운동장역은 인근에 주경기장과실내체육관, 야구장, 수영장, 학생체육관등이 있어종합운동장역으로 명명되었다. 행정구역으로는 송파구 잠실1동에 위치하고 있다.

삼성(무역센터)삼성동은 신라성왕 10(794)에 창건된 사찰인 봉은사, 삼성동동쪽 한강 가운데 있는 섬으로 남쪽에 어린아이와 같이 생긴 바위와무릉도,당나무를 파는 상점이 많은 닥점의 세마을이 합하여져 지어진 명칭이다.

선릉선정릉은 삼성동 135-4번지 65만평 부지에 조선제9대 성종과 계비정현왕후 윤씨의능인 선릉과 제11대 중종을모신 정릉이 있어 흔히 삼릉공원이라고도 불리는데 능의 봉분이 세곳에 따로떨어져 있다하여 편의상 붙인 이름이다.

역삼역촌의 세마을인 말죽거리,하방하교,상방하교가 교차하는 지점으로 역삼리라 하였고, 도시개발및 인구증가로 역삼동이 되었다.

강남역삼동은역촌(驛村)의 세마을인 말죽거리,하방하교, 상방하교를 병합하여 역삼리 (驛三里)라 하였고 그 뜻을 따서 동리명칭으로 삼았다. 강남역은 강남구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 강남 으로 명명되었다.

교대 (법원·검찰청)교대역은인근에 서울교육대학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이 역이 위치한 瑞草洞은 예전에 이곳에 서리풀이 무성했기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또한 법원, 검찰청이 있어 병기하여 부르고 있다.

서초서초역이위치한 정곡(鄭谷)과 왕촌(王村)이란 마을이 있었는데, 이는 정씨와 왕씨가 많이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방배방배동 동명의 유래는 관악구와 서초구와의경계에 솟은 우면산을 등지고 있는 동리라는 뜻의 방배라 한데서 유래한다. 또 일설에는 북쪽에 흐르는 한강을 등진() 모서리()란 뜻으로 방배동으로불리어 졌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사당사당동은 옛날 이곳에 큰 사당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된 것으로 전해온다. 이곳 관악산기슭에는 사적 제247호로 지정된 백제 요지가 있다. 즉 이곳은 백제 중기 이후의 토기 생산지로한강변의 백제 요지로는 유일한 곳이다.

낙성대고려시대의 공신 강감찬장군의 출생지로 큰별이 떨어지던날 밤 태어났다는 전설에 따라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낙성대라 칭하였다.

서울대입구(관악구청)봉천동(奉天洞)은이 지역이 관악산 근처의마을로서 산이 험하고 높다하여 생긴것이다. 경기도 시흥군동면 봉천리였다가 196311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봉천동이라 불리웠다. 인근에 서울대학교와 관악구청이 있어 서울대입구(관악구청)역으로 명명되었다.

봉천봉천동(奉天洞)은 관악산 근처의 마을로 산이 험하고 높다하여 생긴 이름으로 경기도 시흥군 동면 봉천리 였다가 196311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봉천동이라 하였다.

신림지금의 신림4거리 일대는 옛날 '서원말'이 있던 마을로 서원말의 유래는 이곳에 서원정이라 는 정자가 있어 강감찬장군이 송도9개성을 왕래할때 자주 들렸다는 고사에서 유래 하였다. 지금의 신림동은 본시 서원리, 신림리, 난곡리로 나뉘어 있다가 1911427일 경기도의 관내 동,리 통폐합의 신림리로 통합되었다가 196311일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신림리가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신림동이 되었다.

신대방신대방동은 360년전에 '높은절'과 번뎅이(번당리라고하는데 낙천군과 연령군의 묘를 모신 계동궁 연못이 있던곳)라는 두 마을로 이루어진 곳이다. 193641일 경성부로 편입되 면서 당시의 신갈리와 번대방리를 합하여 신대방으로 하였다.

구로공단구로동은 옛부터 불리어오던 동명으로 나이많은 노인9명이 오래도록 장수하였다는 데서 유래되었으며 한국 수출산업공단이 인접하고 있어 구로공단역으로 명명되었다.대림(구로구청)1949. 8. 13 대통령령 159호에 의한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편입에 따라 경기도 시흥군 구로 리, 도림리, 전대방리를 편입, 구로동, 신대방동, 신도림동등으로 명칭변경 신대방동의 '' 자와 신도림동의 ''자를 따서 대림동으로 명하였고 1984. 5. 22 2호선 서측간 개통에 따라 대림역으로 명하였다.

신도림도림동은 산형국(山形局)이 마을 뒤로 성()처럼 둘러싸고 있는데 이마을이 국도에서 돌아 앉아 있다고 해서 도야미리(道也味里)가 도림(道林)으로 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하나는 도림리 일대의 들판에 억새풀 종류의 새나무가 많았으며 특히 길 옆에 삿자리 일종의 풀이 숲을 이루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문래문래동은 광복후 문익점의 목화 전래의 이름을 따서 문래동이라고 하였다는 해석이 있고 또 일설은 학교와 관공서등이 들어서 자글이 온다는 뜻에서 동명이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영등포구청당산동은 이마을 언덕에 당()이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일설에는마을 한가운데 에우뚝솟은 산이 있어 단산(單山)이라고 지칭하는데 이곳에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어 이를 보호 하였고 또 동제당(洞祭當)이 있어 당산이라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영등포구청 인근에 위치하고 있어 영등포구청역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당산당산동은 이마을언덕에 당()이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일설에는 마을 한가운데에 우뚝솟은 산이 있어 단산(單山)이라고 지칭하는데 이곳에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어 이를 보호 하였고 또 동제당(洞祭當)이 있어 당산이라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합정합정이라는 명칭은 옛날 양화나루근처의 마을로 그 일대를보통 양화도로 호칭한다. 조개우물로 불리워지는 우물이 있으므로 합정동의 이름이 생겼는데 후에 합정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홍대입구동교동이란 동명은 세교라는 이름이 '잔다리'라고 하는데서 생겼으며 지형이 좀 높은 곳에 위치하여 있었기 때문에 '윗잔다리'라고 불렸던 것인데 인근에 홍익대학교가 위치하고 있어 홍익대학교로 명명되었다.

신촌(지하)신촌동의 명칭은처음 '새터말'이라고 부르던 곳인데 육전소례에 한성부 서부 용산방 신촌리 계가 나타났다. 이곳은 조선초기에 이성계가 새로운 도읍지를 찾을 때 모악을 주산으로 해서 이곳을 서울로 삼자는 주장과 신하들의 여론에 따라 몸소 신촌동 일대를 돌아보고 갔다고 한다.

이대대흥동은 독은 구워파는 것을 업으로 삼는곳이라는 의미에서 독막 또는 독마을로 불리워 지던지방이었다. 19364월 경성부의 지역을 확대하면서 대흥정으로 되니 이것이 대흥 이라는동명의 시초가 되었다. 인근에 이화여자대학교가 있어 이대역으로 명명되었다.

아현아현동은 조선 고종 31년 갑오경장때부터 기록으로 전해오며 남쪽에 만리현과 서북쪽의대현이라는 두 큰 고개 중간을 잇는 이 고개가 작기때문에 '애고개' 즉 아현으로 부르던 것이 아()가 아()로 변하여 아현(阿峴)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충정로(경기대입구)충정로란 지명은순국열사 중 최초이며 대표적인 인물인 민충정공(閔忠正公)의 이름을 영원히기념하기 위해 붙여졌다.충정로는 19461011일부터부르게 된 동명이다.

용답용답동 동명은 용두동 지역과 답십리동 지역 일부가1975101일에 통합되어 이루어졌기때문에 머리글자인 용·답을 따서용답동이 되었다.신답도림동은 산형국(山形局)이 마을 뒤로 성()처럼 둘러싸고 있는데 이마을이 국도에서 돌아 앉아 있다고 해서 도야미리(道也味里)가 도림(道林)으로 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하나는 도림리 일대의 들판에 억새풀 종류의 새나무가 많았으며 특히 길 옆에 삿자리 일종의 풀이 숲을 이루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도림천도림동은 산형국(山形局)이 마을 뒤로 성()처럼 둘러싸고 있는데 이마을이 국도에서 돌아 앉아 있다고 해서 도야미리(道也味里)가 도림(道林)으로 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하나는 도림리 일대의 들판에 억새풀 종류의 새나무가 많았으며 특히 길 옆에 삿자리 일종의 풀이 숲을 이루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양천구청양천 옛지명은 제차파의(구멍바위)로 서부한강변 가양동에 있는 암굴에서 유래한 것으로 고려 충선왕2년에 비로서 양천(陽川)이라는 지명이 명명되어 작은 암초의 땅이름에서 보다 넓은 뜻을 가진 땅이름으로 전환되었다.

신정네거리자연마을이었던 신기(新機:신트리)''()자와 은행정의 ''()자를 따서 신정리라 한데서 비롯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천현에 속하였던 것을 갑오개혁시 양천현이 양천군으로 승격됨에 따라 오금리, 단산, 충청촌, 신기리, 은행정리등 여러 부락들을 합하여 양천군 장군소 면 은행리와 신시리로 하였다.

3호선역 명지 명 유 래

지축경기도 고양시 지축동은 조선시대 종이를 만들던 마을인 지정리와 싸리나무가 많이 자생하 던 마을인 축리로 되어 있었던바, 일제시대를 접어들면서 양주군 신혈면으로 편입 되었다. 이것이 해방후 고양군으로 편입되면서 지정리의 ''와 축리의 ''을 합쳐 지축리로 되었던 것이다.

구파발구파발이란 지명은 조선중기부터 공문서를 전달하기 위한 파발역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지역은 옛부터 경의가도의 덕수원이란 국립여관외에 주막과 대장간이 많았다.

연신내옛날 이곳은 산골 이었지만 한성부의 관할구역으로서 연서역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연서역은 조선초에 영서역이라고 칭하였는데 인조반정때 상단부사 이서가 이곳에 늦게 합류했다하여 영서역이 연서역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흔히 이곳을 연신내라고 하는 것은 연서천을 이처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불광불광동이란 지명은 이 근처에 바위와 절이 많았는데 그중 부처의 서광이 어린 불광사가 위치함으로 유래되었으며 이곳은 조선왕조때 한성부 관할구역으로 수리봉 산밑에는 산돼지가 많이 내려와 농작물에 피해를 입은 저서현이라는 고개도 있다.

녹번녹번이란 지명은 녹번이 고개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곳에서 홍제동으로 가려면 이 고개를 넘게 되는데 이 고개에서 약용으로 쓰이는 자연동인 산골>이 나오므로 녹반현으로 부르게 되었다. 녹반현은 변음되어 녹번이 고개로 칭하게 되었는데 이 고개가 워낙 높고 험한데다가 숲이 우거져 혼자 넘어 다니기를 꺼렸다고 한다.

홍제홍제라는 지명은 고려때부터 이곳에 홍제원이 있었기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홍제원은 서울 근교의 국립여관일뿐 아니라 조선말까지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으로 그 규모가 컸다고 전해온다.

무악재한양천도에 주요역할을 한 무학대사와 관련하여 무악현, 무악재라 칭하였으며 태조 3년 태조가 몸소 이곳에서 한양의 자세를 관찰한후 천도를 결심하였으며 또한 인왕산에 산세가 험준하여 호랑이가 많아 한양으로 입성할때 여러사람이 모여서 재를 넘었다 하여 모아재 라고도 하였다.

독립문독립문역은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상징하는 독립문이 세워져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문은 1897년 서재필 박사의 노력으로 영은문 대신 세운것으로 현재 사적 32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이곳을 영천이라 부르게 된것은 악박골 약수가 유명했기 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경복궁(정부중앙청사)경복궁은 태조 이성계가 서울에 도읍을 정한후 새왕조를 상징하는 궁전을 1395년 창건했던 초기에는 비교적 소규모였으나 태종, 세종때에 이르러 증축되었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250년 후인 1869년 고종때 이르러서야 왕권확립 차원에서 오늘날의 규모로 재건립되었다.안국안국동은 조선초부터 이 일대를 안국방(安國坊)으로 정했기 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이곳은 전일에 북촌(北村), 또는 '웃대'로 불리던 '서울 중의 서울'이었다. 조선초 성종때 월산대군의 풍월정이 있었으며, 조선말 고종과 명성황후가 혼례식을 올린 안동별궁이 인근에 있었다.

종로3종로는 조선왕조 500년동안 밤에는 인정(人定), 새벽에는 파루를 쳐서 도성 8개문을 여닫게 하는 종루(鐘樓)가 있어 유래된 것이다. 이거리에는 조선초부터 시전이 있었던 번화가였으 므로 일명 운종가로 칭한 서울의 중심가 였다.

을지로3을지로는 우리나라 위인중 한사람인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성을 따서 붙인 것이다. 조선왕조때는 구리개로 불리던 이 길은 1914년부터 황금정(黃金町)으로 고친 적도 있다. 옛날 이 길은 종로 만큼 변화하지는 않았으나 관공서와 시전(市廛)이 들어서 있고 가내 수공업이 성한 곳이었다.

충무로충무로는 임진왜란때 명장 충무공 이순신의 시호를 붙인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곳은 건천동 즉 현재의 인현동1가 였으므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충무로로 지었다. 이곳은 남촌 또는 아랫대로 불리우던 지역으로 사육신의 힌사람인 박팽년 외에 많은 명사들이 살았다.

동대입구동대입구역이 위치한 장충동(奬忠洞)은 광무 4(1900) 을미사변때 순국한 사람들을 위하여 단을 꾸며놓고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남소영(南小營)이 있던 곳에 설치된 장춘단은 일제가 폐지하고 공원을 조성하였다.

약수약수역은 1970년까지 약수동이란 행정구역 명칭이 있었으므로 유래된 것이다. 약수동은 신당 3동 지역에 위장병에 특효가 있는 약수가 있어서 유래된 것이다. 전에는 이곳에서 한남동 으로 가려면 높은 고개를 넘어야 했는데 이 고개 이름을 버티고개라 칭했다.

금호금호동은 옛부터 대장간이 많았으므로 "무수막"또는 한자음으로 수철리( 水鐵里)라고 칭하 던것이 1936년부터 금호동이 되었다. 이곳은 지형관계로 농경지는 별로 없지만 옛부터 주민 들이 대장간, 복숭아 재배, 나루터 일에 종사하는 등 근검절약으로 생활수준이 높았던 곳이다.

옥수옥수동은 이곳에 '옥정수'라는 우물이 유명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바위틈에서 나온 이 우물은 그맛이 뛰어나 왕에게 바치기도 했는데 1960년 도로공사때 매몰되었다.

압구정압구정역은 조선조 세조,성종때 권신 한명회가 세상일을 잊기 위해 강가의 갈매기를 벗삼아 지내겠다는 정자 이름이다. 전일의 이곳은 돛단배 떠있는 "동호"와 강북의 원근 풍경 그리고 닥나무가 무성한 저자도 등이 펼쳐져 한 폭의 그림같은 절경이었다고 한다.

신사신사동은 1914년 새말(新村)과 사평리(沙平里)의 두 마을을 합칠때 각각 첫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이곳은 광주군 언주면에 속해 있을 당시에는 모래 벌판에 "새말" 나루터가 있던 한적한 곳이었으나 1963년에 서울시에 편입된 후 크게 변했다.잠원잠원동은 조선초 잠실을 이곳에 두었기 때문에 유래된 것이며, 원래 이곳은 시흥군 신동면 잠실리였는데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될때 강동구 잠실동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잠원동 이라한 것이다. 잠실은 잠실도회의 준말로서 조선초의 국립 양잠소였다.

고속터미널반포동에 고속버스 터미널이 들어선 것은 197691일로 이곳은 서울역과 함께 서울의 관문이 되었습니다. 이곳을 반포동이라고 부르게 된 연유는 개울이 구불구불 흐르기 때문에 서릿개 또는 蟠浦라고 부르던 것이 변하여 盤浦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교대 (법원·검찰청)교대역은 인근에 서울교육대학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며 이 역이 위치한 서초동은 예전에 서리풀이 무성했기 때문에 유래된 것이다.남부 터미널(예술의 전당)서초동에 위치한 화물터미널로 인해 화물터미널역으로 되어 있었으나 화물터미널이 이전하 고 이전장소에 남부시외버스 터미널이 들어와 남부터미널역으로 개명하였다. 서초동에는 정곡과 왕촌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이는 정씨와 왕씨가 많이 살았기 때문이다.

양재(서초구청)양재라는 지명은 조선시대부터 교통, 우체역할을 하던 양재역이 이곳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이곳을 말죽거리라고 부르는 것은 인조임금이 이괄의 난을 피해 이곳을 지나 가다 유생들이 팥죽을 급히 쑤어 바치자 말위에 탄채로 팥죽을 들었다는 것으로부터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매봉이곳은 본래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이었으나, 1963년 서울시에 편입 되었으며 독구리(지금의 도곡) 마을 사이에 약 95m정도의 매봉산이 위치하고 있다.

도곡도곡의 유래는 마을뒤에 매봉산이 둘러있고 물아래쪽 산부리에 돌이 많이 박혀 있어 돌부리라하던 것이 변하여 독구리, 독곡이 되어, 지금의 도곡이라 명명하였다.

대치대치동 동명의 유래는 당시 자연부락 7,8개 마을중 큰고개 밑에 있는 한티(또는 한터) 마을을 한자명으로 대치라 한데서 비롯되었다.

학여울학여울이란 탄천과 양재천이 만나는 지점인 한강 갈대밭 부근의 옛지명이 대동여지도에는 鶴灘으로 ''을 한글로 풀어서 학여울이라 제정하였다.(여울:강이나 바다에서 얕거나 좁아 물살이 빠르고 세찬곳)

대청현지 일원동 677번지 일대로서 일제때인 1914년 조선총독부령 제 111호에 의한 경기도 구역 확정때에 이지역에 있던 대청마을이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일원리와 합병되었던 곳 으로 대청역은 합병되기전 옛고을 지명으로 명명되었다.

일원일원 동명의 유래는 옛날 이 마을에 일원이라는 서원이 있었으므로 일원이 변하여 일언이라 한데서 연유하고 또한 이 근처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므로 본동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일설 에는 이 마을의 사방이대모산에 가리워져 숨겨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일원동이라 불리어 졌으며 '일원역'은 이러한 유래가 있는 법적 동명을 사용했다.

수서이지역의 서쪽에 한강물이흐른다하여 수서리라 하였다하며 예전부터 일원동과 같이 변천 해 왔다. 또한 이곳은 조선 태조의 제7자 무안대군(방번) 내외 및 그 자손들의 묘소와 전주 이씨 장의 공파 묘소 700여기가 있어 궁말 또는궁촌이라 불렀으며 서울특별시에서는 지방 유형 문화재 제 48호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4호선역 명지 명 유 래

당고개예로부터 당고개(일명:덕능고개)는 산짐승이 많아 나그네들이 몸을 보호하기 위해 돌을 들고 넘었으며 그돌을 쌓아둔 서낭당 터가 이곳에 있어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서낭제를 지낸다.

상계불암산과 수락산의 골짜기에서 생겨난 '한천'이 중랑천으로 이어지고 이 한천의 계곡 윗부분을 상계라 일컫고 하부를 하계라 한데서 유래됨.노원노원이란 명칭은 조선시대의 국립여관격인 원()터가 있었던 곳이라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하며, 서울 근교에서는 이와같은 홍제원, 이태원등이 있었다고 한다.

창동창동이라는 지명은 본래 이지역 일대가 넓은 들판으로서 조선시대에 임금님께 곡식을 진상하던 곡물창고가 있었던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쌍문쌍문이란 지명유래는 쌍갈래길에 이문이란 일종의 방범초소가 있어 '쌍갈무늬'라고 불리던 것이 변음된 것이라고 한다.

수유수유리라는 지명은 인근의 우이천이 장마철이되면 흔히 물이 넘쳐 물결치는 모습이 아름답다 하여 수유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미아'미아'라는 지명은 고려말기부터 부근 야산의 언덕에 있던 마을의 모습을 넓을 미()와 언덕을 뜻하는 아()를 합하여 부르던 것으로 원래는 삼각산 끝의 양지바른 곳이라 하여 삼양동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미아삼거리'미아삼거리'라는 명칭은 장위동과 종암동 그리고 돈암동으로 갈라지는 세갈래 길이 나뉘어 지는 지형에 붙여진 이름이다. 한편 이 일대는 예로부터 밤나무숲이 많아 밤나무골 월곡 (月谷)이라는 지명이 전해지기도 한다.

길음길음(吉音)이라는 지명은 일명 기레미골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말은 본래 이 지역을 통과하는 정릉천이 흐르는 계곡마다 그 물소리가 맑고 고와서 좋은 노래소리가 들리는 동네라는 뜻으로 지금은 그 음을 따서 길음동으로 불려지고 있다.

성신여대입구(돈암)돈암동이란 지명은 되너머고개 즉 돈암현(敦岩峴)이 있기 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현재는 미아리 고개라고 불리고 있지만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되놈'이 이 고개를 넘어 침입해 왔기 때문에 되너미고개라고 한데서 유래되었다.

한성대입구(삼선교)삼선교(三仙橋)라는 지명은 이 지역 남쪽의 옥녀봉 봉우리에 하늘에서 내려온 세 선녀와 옥녀가 함께 어울려 놀았다는 전설이 오늘에까지 전래되고 있는데서 유래된 것이다.

혜화혜화라는 지명은 근세 조선의 도성8대문중의 하나로서 혜화문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또한 혜화문이 위치했던 숲의 무성한 고개를 '동소문고개'라 했다 해서 동소문으로 불리어 졌었다고 한다.

동대문동대문은 흥인지문의 속칭으로 도성 4대문 중의 하나이다. 보물 1호로 지정된 동대문은 조선초 태조때 세워졌지만 조선말 고종때에 완전히 해체하여 바닥을 높인다음에 건축한 것이다. 이 문을 특별히 옹성으로 쌓은것은 이곳의 지대가 낮아 외적을 방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동대문운동장조선시대 군졸들이 무술훈련을 하던 훈련원 터였고 일제때는 육상경기장, 야구장,정구장이 완공되어 경성운동장으로 불리어졌고 해방후 경마장의 시초가 된 곳이며 또한 광희문 (시구 문)이 인접해있다.

충무로충무로는 임진왜란때 명장 충무공 이순신의 시호를 붙인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곳은 건천동 즉 현재의 인현동1가 였으므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충무로로 지었다. 이곳은 남촌 또는 아랫대로 불리우던 지역으로 사육신의 힌사람인 박팽년 외에 많은 명사들이 살았다.

명동명동은 갑오개혁(1894)때 처음 붙여진 이름으로 이는 조선초부터 이곳을 명례방이라고 한데서 유래된 것이다. 유행의 1번지로 일컫는 이곳은 한때 다방을 중심으로 '예술의 거리'로 알려져 있다.

회현(남대문시장)회현동은 조선말 고종때 처음 붙여진 이름으로 이는 전일의 호현동(好賢洞)이 반음되어 유래된 것으로 이곳에는 조선왕조때 정광필, 김상헌 형제등의 어진 사람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회현동(會賢洞)라 불리어진 것이다.

서울역광무4(1900)에 남대문역으로 출발한 서울역은 우리나라 철도의 대표적인 역으로 주요철도의 시발점이자 종착역이다. 1923년 경성역으로 개칭되었으나 광복후 1947년에 서울역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사적 284호로 지정된 서울역사는 1925년에 지어진 건물로 서울의 관문이다.

숙대입구(갈월)숙대입구역이 위치한 갈월동은 갑오개혁때 붙여진 명칭으로 칡이 무성하여 유래된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곳은 산줄기가 불룩하게 나와 있어 '부룩배기'라고도 불린다.

삼각지현재 삼각지역이 세워진 곳은 옛날 한강, 이태원, 서울역방면으로 도로가 나있어 땅모양이 세모졌다고 하여 삼각지로 불리운 것이다. 이곳은 한강로1가 지역이지만 조선 중기 이후 에는 둔지방이라 칭해왔다.

신용산용산의 지명은 백제 기루왕때 한강에서 두마리 용이 나타나 유래되었다는 설과 산줄기가 마치 용처럼 구불구불 뻗어 나갔기 때문에 불리어 졌다는 설도 있다. 서울의 경우 무악에서 부터 시작된 산줄기는 남쪽의 약현과 만리현을 지나 한강변에 와서 머리를 든 용과 같은 지형을 나타내고 있다.

이촌이촌동은 옛날부터 중지도와 상변에 살던 사람들이 큰 비만 오면 대피했기 때문에 이촌동 으로 되었다고 한다. 또한 1914년에 신촌리, 사촌리의 두 마을을 합쳤기 때문에 이촌동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동작조선 왕조때 서울과 수원이남 지방을 잇던 동재기 나루 즉, 동작진에서 유래됨나가는곳.

총신대입구(이수)총신대입구(이수)역은 이곳에 이수교가 있으므로 유래된 것이다. 이수교는 배물다리를 한자음으로 고친 것으로 이 다리 남쪽에 배나무골이 있고 동쪽에는 한강물이 흐르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사당사당동은 옛날 이곳에 큰 사당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된 것으로 전해온다. 즉 이곳은 백제 중기 이후의 토기 생산지로 한강변의 백제요지로는 유일한 곳이다.

남태령남태령은 서울과 삼남(호남,영남,충남)을 잇는 길목이었다. 관악산의 북동쪽 능선을 가로지르는 고개의 남서울쪽에는 우면산 정상이 각각 자리잡고 있다. 남태령의 이름이 '여우고개'로 불리고 있을때 조선시대 정조는 이 고개를 넘어 수원에 있는 부친 사도세자의 능을 자주 참배 했다고 함. 정조가 이 고개를 넘을때 시종들에게 이 고개 이름을 물었을때 남태령이라고 답했었다고 함. 그후 이 고개를 남태령이라고 불렀다.

5호선역 명지 명 유 래

방 화산의 형국이 꽃피는 모습과 같은 개화산 옆에 발달한 동네라는 뜻으로 생겨난 동명 에서 유래.

개화산산의 모양이 꽃피는 형국을 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개화동의 면적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높이 132m의 개화산의 영향으로 유래됨.

김포공항김포공항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송 정소나무가 많이 심어져 울창했고 이곳에 누가 지었는지 모르는 소나무로 된 정자가 있으므로 그 정자 이름을 송정이라 하고 일대를 송정리라 부른데서 유래.

마 곡옛날에 이 동네에 삼()을 많이 심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발 산·외발산동이 경계를 이루는 해발 72.3m로 수명산이 마치 밥주발을 엎어놓은 모습이라 하여 발산이라 불림.

우장산우장산은 내발산동과 화곡 제5동에 걸쳐 있는 높이 98m의 산으로 옛날에는 기우제를 지냈던 산으로도 유명하다. 우장산이란 이름은 이 산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즉시 비가 내리므로 반드시 우장을 준비하여 기우제에 임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화 곡예로부터 땅이 기름져 벼가 잘되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누렇게 익은 벼가 계곡에서 황금물결치는 풍경을 이루었다고 하여 유래됨.

까치산봉제산(매봉산) 일대에는 예로부터 까치가 많이 서식하였으나 화곡동 개발계획에따라 봉제산 중턱까지 주택이 들어서고 인구가 급증하면서 봉제산 일대의 까치들이 갈 곳이 없어지자 비교적 늦게 개발된 이곳 까치산(해발 73.5m)으로 몰려들게 되어 까치산이라는 산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다.

신 정자연마을이었던 신기(新幾 : 신트리)의 신()자와 은행정의 정()자를 따서 신정리라 한데서 유래.

목 동목동의 동명은 김포군 양동면 목동리에서 비롯되었으며 양천군 남산면의 작은 부락인 달기리, 엄지리, 남아리, 모새미, 마장안을 합쳐 외목동, 내목동, 월촌리가 되었으며 처음에는 牧洞(목동)이라 하였고 점차 표기가 달라져木洞(목동)으로 불려졌다.

오목교조선초 한강의 3대 나루터에 속했던 양화나루를 건너 경인지역으로 통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건너야 했던 안양천 위에 세워졌던 다리이며, 당시 오목내라 불리던 지금의 안양천 위에 다리가 세워지면서 오목교(梧木橋)라 불리게 됨.

양 평고려시대 이래 조선시대까지 설치되어 서민들의 한강도강의 중요한 통로가 되었던 양화진 근처 벌판에 이루어진 마을이란 뜻에서 불리어진 것으로 楊花津자와 벌자를 따서 "양평"이라 명명됨.

영등포구청영등포구청역은 인근에 영등포구청이 있어 명명되었고, 영등포란 명칭은 조선시대에 있는 성황당에서 영등포굿을 했던 관계로 영등포라는 이름이 불리어지게 되었다.

영등포시장1936년 일제칙령에 의거 영등포시장이 형성되었고, 1967년 당시 시장의 명에 의거 현대화 상설시장으로 변모한 이래 현재에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신 길샛강을 경계로 여의도와 마주보고 있는 신길동은 조선시대에 서울로 들어오는 영등포나루터가 있었던 곳이다. 신길동의 이름은 조선시대 포구로서 신기라고 불려진 마을이 새로 좋은 일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지어졌다고 한다.

여의도예로부터 라의주로 불렸던 섬으로 홍수에 잠길 때 현재 국회의사당 자리에 양말산이 머리를 내밀고 있어 부근 사람들이 그것을 "나의 섬", "너의 섬"하고 지칭하던 데에서 이것이 한자말 여의도(汝矣島)로 호칭됨.

여의나루옛날 마포와 여의도를 잇는 나루터가 마포와 여의도 동쪽에 형성되어 교통을 원활하게 하였으나 한강다리 건설로 없어졌던 여의나루터에 1986년 유람선 선착장이 개장되었다. 여의나루 역명은 여의나루터 옛 명칭에서 유래한 것이다.

마 포우리말 삼개로 불리어지는 포구 이름 마포에서 유래한 것이다., ()()의 한자음에서 따옴.

공 덕우리말로 좀 높은 곳을 "더기" 또는 "", "언덕"으로 호칭하는데 공덕동 일대는 대개 만리현, 아현, 대현 등 고개마루에서 서남쪽으로 펼쳐 내려간 언덕진 지대이기 때문에 이 지역을 옛날에 우리말로 "큰더기", "큰덕이", "큰덕"으로 불려지던 것이 당시 음이 비슷한 한자의 공덕(孔德)으로 된 것으로 보여진다.

애오개애오개는 "작은 고개" 또는 어린애와 관련이 있는 고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만리현과 서북쪽의 대현이라는 두 큰 고개 사이에 있는 작은 고개라는 의미에서 아기고개, 아이고개, 애고개, 애우개로 호칭되었음.

충정로충정로는 순국선열의 대표인물인 충정공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하여 붙였던 것으로 충정로는 1946101일부터 부르게 되었다.

서대문중국과 통하는 의주로의 관문으로 도성 서쪽의 정문이다. 서대문의 정식명칭은 돈의문이며 새로운 문이란 뜻으로 새 문, 신문이라고도 불림.

광화문광화문은 경복궁의 남정문으로써 당초 1359(태조4) 9월에 창건되어 정도전에 의해 사정문으로 명명되었으나 1425(세종7) 집현전에서 광화문으로 바꾸었다.

종로3조선시대에 인정과 파루라고하여 아침, 저녁 사대문을 열고 닫는 시각을 종소리로 알렸는데 그 종루가 있는 거리의 뜻으로 종로라 불림.

을지로4을지로는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성을 따서 붙인 것이다. 조선왕조 때는 구리개로 불리던 이 길은 1914년부터는 황금정(黃金町)으로 고친 적도 있다. 이곳은 을지로의 중심부로 을지로4가 명명되었다.

동대문운동장동대문운동장(東大門運動場)1926년에 육상경기장, 야구장, 정구장을 완공하면서 경성운동장으로 불려졌다. 원래 육상경기장은 조선 500년간 정병들의 선발과 무술훈련을 하던 훈련원 터였고 또한 야구장은 훈련도감의 군영인 하도감이 있었는데 개항 후에는 이곳에서 별기군이란 신식군대가 훈련을 받았다.

청 구청구란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지칭하던 말로 지역주민의 의견을 수렴하여 지하철 역명을 제정.신금호금호의 옛말은 무쇠막(무수막)으로 조선시대 한자음으로 수철리로 불리다 금호동이라 바뀌었다.

행 당행당동 동명은 갑오개혁(1894)부터 행당리동으로 칭하여 내려온 것으로, 행당초등학교 동쪽산 일대에 살구나무와 은행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 행당이라는 동명이 생겼다고 한다.

왕십리왕십리 동명의 유래는 조선초에 무학대사가 도읍을 정하려, 이곳까지 와서 도선대사의 변신인 늙은 농부로부터 십리를 더 가라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왕십리(往十里)라 전해오고 있다.

마 장조선초기부터 말을 기르던 양마장이 이곳에 있어서 마장동이라 불리게 됨.

답십리무학대사가 도읍지를 정하려고 이 곳을 밟았다 하여 답십리라 했다는 구전이 있는데 일설에 의하면 동대문에서 걸어서 십리에 위치한 곳에서 유래됨.

장한평신라시대에 장한성(長漢城)이 축조되어 인근지역이 장한벌 또는 장한평으로 불렸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장안평으로 잘못 불려져 왔던것을 삼국시대부터 불리워진 이 지역의 옛 지명으로 다시 찾은 것임군 자옛날 어느 왕의 일행이 거동하다가 마침 이곳 남일 농장터에서 묵게 되었는데 그날밤 동행하던 왕비가 옥동자를 낳았으므로 이곳을 군자동이라 하였다고 전하며 지금도 이곳을 명리궁터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차산광진구 능동 일대에 있는 아차산을 고유지명으로 아차산과 아차성은 예로부터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의 사랑과 온달장군이 전사한 곳이라는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다.

광나루도선장으로 강폭이 넓은 곳에 나루가 있다하여 얻어진 이이며 너분나루라고 불려졌다. 옛부터 강원·충청 등지의 광물, 목재 등의 주요 운송로로 이용되었고 행인과 상인이 한양으로 들어가는 교통요충지로 고려조에는 이곳에 수참을 설치하였음. 1936년 광진교가 세워지면서 나루터의 기능을 잃게 됨.

천 호원래 지명은 곡교리로 옛날부터 이 곳이 인가 수 천 호가 살만한 지역이 되리라는 풍수지리설에서 동명을 따온 것이다.

강 동강동역의 유래는 인근에 강동구청이 자리하는 관계로 구를 대표하는 의미에서 쓰여졌다. 강동구는 197910월 강남구가 분구되면서 신설되었다.

길 동마을로부터 강이 멀리 떨어져 있고 주위에 높은 산이 없기 때문에 물난리 또는 산사태 등의 천재지변이 없는 살기 좋은 길한 곳이라 하여 길동이라 불렸다는 설과 마을의 모양이 나뭇가지처럼 길다하여 기리울이라 불리던 마을이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굽은다리당말이란 마을과 벽동이란 마을을 잇는 다리가 굽어있어 굽은다리라 불렀다. 두 마을을 합하여 굽은다리의 이름을 따서 곡교리라 하였다.

명 일고려 성종 11(994)에 이곳에 공용으로 출장하는 관리들의 숙박소로서 명일원을 두어 여행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도모해 주었으므로 그 이름을 따서 명일원, 원텃골이라 한데서 유래되었다.고 덕고려말 형조참의 이양중이 태조의 조선건국을 반대하고 이 지역에 거주하면서 벼슬도 거절하는 등 굳은 절개를 지켜 주위로부터 덕이 높은 인물로 추앙 받아 고덕리 또는 고덕마을로 불려지게 되었다.

상일동상일동과 하일동의 사이를 흐르는 내()의 위쪽이므로 이름을 따서 상일동이라 칭함.

둔촌동광주 이씨의 시조이며 고려말의 은사인 이집이 일시 거주한 사실이 있으므로 그의 호를 따서 둔촌동이라 하였다.

올림픽공원88올림픽을 계기로 형성된 올림픽공원과 올림픽기자촌 및 선수촌 아파트를 배경으로 역사가 위치함으로써 명명됨.

방 이마을의 지형이 아늑하고 개나리꽃이 많이 핀다고 하여 방잇골로 불리다가 한자음으로 방이동이라 고쳐진 것이다.

오 금일찍이 이곳에 오동나무가 많았고 가야금을 만드는 사람이 살았기 때문에 유래되었다는 설과 병자호란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가는 길에 이 곳의 백토고개에서 잠시 쉬면서 측근의 신하에게 무릎 안쪽의 오금이 아프다고 말하자 그후부터 오금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설이 있다.

개 롱조선조 이조때 임경업장군이 갑박산에서 고리궤짝을 주어와서 현재 가락2동 개롱 근린공원 위치에서 고리궤짝을 열어보니 투구와 갑옷이 나왔다하여 개롱이라 전해옴.

거 여이 지역이 본래 경기도 광주군 중래면의 일부로서 거암이란 사람이 살았으므로 거암리라 하던 것이 변하여 검이, 겜리라 불리다가 경기도 구역행정에 따라 잔버드리, 개롱리, 뒷말을 병합하여 거여라 부름.

마 천이 지역에 있는 마산의 이름을 따서 마천리라 하였던 데서 유래된다는 설과 조선조 임경업 장군이 마산(천마산)을 가는 도중 백마를 얻어 거여동을 지나다가 백마에 물을 먹여 백마물이란 곳이 있고, 아무리 가뭄이와도 물이 계속 나온다고 하여 馬川이라 하였다는 설이있음.

6호선역 명지 명 유 래

응 암마을 뒤 백련산 기슭에 있는 커다란 바위의 생김새가 마치 매가 앉아 있는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매바위골이라 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이 곳에서 사냥을 하기 위해 장막을 치고 포수들이 기거하던 곳이 여러 곳 있었으며 궁중에서 나와 사냥터로 삼았던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역 촌역촌동은 조선조 신하들이 장거리 여행시 말이 쉬어 갈 수 있는 역(延曙驛)이 있어 역말이라 불리어 여기서 역촌이 유래되었고, 옛 지명으로는 마방촌, 토정리라 불리었다.

불 광불광이라는 지명은 글자 그대로 이 근처에 바위와 대소사찰이 많아 부처의 서광이 서려있다고 해서 이름지어진 것이다.

독바위독박굴은 독바위굴의 줄임말로 독바위굴의 바위가 독(항아리)과 같다해서 붙여진 지명이라는 설과, 유달리 바위가 많아 숨기 편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다른 일설에 의하면 인조반정 당시 일등공신이었던 원두표 장군이 거사 직전까지 숨어 지내던 덕바위굴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연신내연신내라는 말은 연()시내() , 延川(延曙川)의 우리말 풀이가 변한 것이라 전하여지고 일설에 의하면 조선조 인조반정 당시 능양군(인조)이 신하를 늦게 만난 개천이라 하여 연신내(延臣川)라 부르게 되었다.

구 산경기도와 도경계를 이루는 뒷산의 산 모양이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어, 옛부터 그 아래 마을을 구산동이라 부른데서 붙여진 이름

새 절새절은 신사(新寺)의 한글 명칭으로 새절은 언제 어느 장소에 있었는지 알 길이 없으나 새절이 있었으므로 해서 유래된 명칭이다.

증 산증산동 뒤에 있는 산의 모양이 시루와 같이 생겼으므로 시루메라 하며, 시루는 물이 새어 좋지 않다하여 아름다운 비단의 뜻을 빌어서 증산(繒山)이라 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수 색지역적으로 한강 하류에 위치한 수색동은 예로부터 물과 깊은 인연이 있던 곳으로 물치, 무르치라는 우리말에서 음이 변하고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수색, 수생리로 표기하였다.

성 산부근에 산들이 성처럼 둘러져 있어 우리말로 "성메" 또는 "성미"라 부르던 성산(城山)이 있는데서 연유되었다.

마포구청마포는 우리말 "삼개"로 불리워지는 포구이름 麻浦에서 유래한 것으로 역사 인근에 마포구청이 위치하고 있어 마포구청역이라 명명

망 원망원동은 효령대군이 지은 정자로 명나라 사신들을 접대하던 연회장이었으며, 성종5(1484) 월산대군이 이름지은 한강변의 명소 망원정이 있었던 데서 유래됨.

합 정합정동은 옛날 양화나루 근처의 마을로 그 일대를 보통 양화도라고 호칭하였고, 조개우물로 불리어지는 우물이 있다하여 합정(蛤井)이라 하다가 후에 합정(合井)으로 불리어 지게 되었음.

상 수상수동의 옛 지명은 서강방 수일리계였는데 한일합방 후 서강면 상수일리가 되었다가 상수동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렀으며, 상수동이란 동명은 강가의 마을 중에서 가장 위쪽에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광흥창조선시대 경기와 3남 지방에서 거두어들인 세수미를 쌓아 두었었다가 관리들의 녹봉을 지급하던 곳으로 그 규모는 1년에 쌀 19,000, 대두 18,000석을 보관할 정도의 대규모 창고가 있었다 하여 광흥창이라 하였다.

대 흥대흥동은 "동막하리"라 하여 인접한 용강동과 함께 독을 구워 파는 것을 업으로 삼았던 지역으로 "독마을"로 불려졌다. 일제시대 이곳은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에 들어가게 되면서 옹막, 옹리의 지명이 동막리로 변경되기도 했다. 1936년 경성부의 대흥정이 되었으며 그 후 몇 차례 행정구역의 통폐합을 거쳐 194610월 오늘의 대흥동이 되었다.

공 덕우리말로 좀 높은 곳을 "더기" 또는 "", "언덕"으로 호칭하는데 공덕동 일대는 대개 만리현, 아현, 대현 등 고개마루에서 서남쪽으로 펼쳐 내려간 언덕진 지대이기 때문에 이 지역을 옛날에 우리말로 "큰더기", "큰덕이", "큰덕"으로 불려지던 것이 당시 음이 비슷한 한자의 공덕(孔德)으로 된 것으로 보여진다.

효창공원백범로와 효창공원 길의 교차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역은 인근에 효창공원(문화재 사적 지정 330)이 자리잡고 있으며 공원 내에는 김구 선생묘, 삼의사 묘(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및 임정요인 묘(이동녕, 차이석, 조성환)가 있어 사적지로 유서가 깃들인 곳이다.

삼각지한강, 이태원, 서울역 방면으로 나있는 도로의 모양이 세모졌다는데서 유래되었다.

녹사평

조선시대 고종까지만 하더라도 수림과 잡초가 무성하여 인가가 희소하던 곳이라 해서 녹사평(綠莎坪)이라 불리어진 것에서 유래.

이태원조선시대 때 이태원(梨泰院)이란 역원(驛院)이 있었기 때문에 이름이 붙여졌는데 역원으로서의 이태원은 오래 전에 없어지고 그 명칭을 가진 동네가 용산구 동북쪽에 자리잡아 현재의 이태원동이 되었다.

한강진한강진터가 있던 곳에서 유래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제천정(濟川亭)에서 소서행장(小西行長)과 싸운 곳.

버티고개한남동에서 약수동으로 넘어가는 다산로(茶山路)고개를 버티고개라고 하는데 옛날 순라군들이 야경을 돌면서 "번도!"라 하며, 도둑을 쫓았으므로 번티(番峙)라 하다가 변하여 버티고개 또는 한자명으로 부어치(扶於峙)가 되었다고 한다.

약 수버티고개에 있는 약수(藥水 : 위장병에 특효가 있음)의 이름을 딴 약수동의 지명에서 유래.

청 구청구란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지칭하던 말로 지역주민의 의견을 수렴하여 지하철 역명으로 제정.

신 당조선 영조27(1751)에 반포된 수성책자도성 3군무 분계총록에 의하면 남부 두모방(성외) 신당리계였으며, 1894년 갑오개혁때 남서 두모방(성외)왕십리계의 신당리동으로 되었는데 신당동은 神堂을 모신 동네라는 뜻과 함께 무당들이 받들어 모시는 신령을 모신 집을 말하며 광희문 밖에 위치한 이곳은 많은 무당들이 모여 살아 무당촌을 이루어 新堂이라는 명칭이 유래됨.동묘앞중국의 고전인 삼국지에 나오는 명장 관우의 사당(보물 제142)으로 정식 명칭은 동관왕묘이다. 임진왜란때 명나라 장수가 꿈에 관우를 현몽한 후 왜병을 격퇴했다고 하여 명의 신종이 난() 후에 비용과 친필로 쓴 현액을 보내와 선조때(1601) 창건하였는데 그 후 영조15(1736)에 중수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 신창신동은 조선초(태조51396)부터 있었던 한성부의 552방 가운데 동부의 인창방(仁昌坊)과 숭신방(崇信坊)의 글자를 따서 1914년부터 "창신동"이라 하였고, 1943년 구제도가 실시됨에 따라 경성부 동부출장소 관할에서 동대문구로 편입되었다가 197510월에 동대문구에서 종로구로 편입되어 현대에 이르고 있음.

보 문보문동3168번지에 있는 보문사(普門寺)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보문동은 19498월 대통령 제159호로 동대문구에서 성북구를 분리할 때 신설동의 일부지역을 편입하여 설치된 것으로 당시 관내에 있는 보문사의 이름을 따서 그 명칭을 제정한 것이다.

안 암큰 바위가 있어 편히 쉴만하고 그 바위 이름을 "앉일바위"라 하였으며, 그것을 한자로 안암(安岩)으로 옮겨 쓴 것에서 유래됨.

고려대고려대학교위 부지위에 역이 위치하여 대학명을 역명으로 사용. 종암동은 고려대학교 뒷산에 북()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한자로 종암(鍾岩)이라고 부른데서 연유한다.

월 곡하월곡동에 있는 산의 형세가 반달처럼 생겼다 하여 그 산에 연해 있는 마을을 다릿굴() 월곡(月谷)이라 부른데서 연유되었다.

상월곡상월곡동은 천장산의 형세가 마치 반달과 같다하여 그 산에 접해있는 마을을 "다릿굴()"이라 부르는데서 유래, 이중 높은 지대에 위치한 지역을 "웃다릿골(上月谷里), 아래 지역을 아랫다릿골(下月谷里)"이라 불렀는데 1894년 갑오개혁때 월곡상리로 명명. 이후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상월곡리가 되어 현재에 이름.

돌곶이마을 동쪽에 있는 천장산의 한맥이 검정돌을 꽂아 놓은 즉, 수수팥떡 경단을 꼬지에 꿰어 놓은 것 같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돌곶이 마을이라 부른데서 유래하며 이것을 한자로 표기하여 석관동(石串洞)이라 함.

석 계석계역은 석관동(石串洞)과 월계동(月溪洞)의 경계지역에 위치하여 석관동의 첫 글자인 석()자와 월계동의 두 번째 글자인 계()자를 조합하여 제정.

태릉입구태릉은 불암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사적 201호로 조선 11대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 윤씨의 능임.(그 북쪽에는 조선 명종과 원순왕후의 능침인 태강릉이 있음).

화랑대인근에 위치한 육군사관학교를 상징하는 화랑대를 역명으로 제정(국철 경춘선 화랑대역이 있음).

봉화산봉화산은 일명 봉우재라고 불리는데 1963.1.1일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에서 서울시로 편입됨. 봉화산이라는 이름에서 봉화와 관련이 있는 지역임을 알 수 있으며 이 곳은 북쪽의 한이산으로부터 목멱산(남산)으로 전달하는 아차산 봉수대가 있던 곳으로 지난 1994.11월 봉수대를 복원하였음.

7호선역 명지 명 유 래

장 암장암동은 원래 둔야면 장자리(長者理), 오암리(烏岩理), 동막리(東幕理)1965년에 시둔면 장암리로 부르다가 1964년에 장암동으로 개칭되면서 오늘날까지 동명으로 사용되고 있다.

도봉산도봉산역은 서울근교의 명산인 도봉산 아래에 위치한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일제가 19144월 우리나라의 부, , 면을 폐합할 당시 도봉산 아래의 다락원, 서말원, 무수원 등 마을을 합하면서부터 도봉 이라는 명칭이 쓰이기 시작했다.

수락산상계동의 북쪽으로 의정부시와 경기도 남양주시 경계에 있는 수락산은 도봉산과 마주하며 서울 북쪽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산은 사암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해발 638m로 수목은 울창하지 않으나 산세가 웅장할 뿐아니라 계곡이 깊고 수려하며 산 전체가 석벽과 암반으로 도처에 기암절벽을 이루고 있다.

마 들예전 상계동에 역참기지가 있어 말들을 들에 놓아 키웠기 때문에 유래되었다고 하는 설과 상계동 일대가 삼밭이어서 순우리말인 마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노 원조선시대 육상교통의 수단인 역점으로서 노원역이 있었다. 예전에는 이곳에 갈대만 무성하고 인가가 없어서 행인이 몹시 곤란을 당하여 나라에서 원을 세워 노원이라 하였다.

중 계자연부락들이 도봉구의 중앙을 흐르는 한내(漢川)의 중간에 위치한다 하여 가운데 자와 시내 자를 붙여 중계라 했음.

하 계하계동은 자연부락들이 도봉구의 중앙을 흐르는 한내(漢川)의 아래쪽에 위치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공 릉1963.1.1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에서 서울시로 편입될 당시 서쪽에 공덕리, 동쪽에 태릉, 강릉이 있었는데 주민들의 합의에 의하여 공덕리의 자와 태릉의 자를 따서 공릉동이라는 지명으로 사용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태릉입구

태릉은 조선 제 11대왕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능으로서 사적 201호로 지정되어 있다.

먹 골먹골은 조선시대 먹을 제조하여 붙여진 묵동이라는 이름을 순수한 우리말로 표기한 것이라고도 하며 문방사우(文房四友)의 하나인 먹을 이 마을의 이름으로 붙여야 학문이 발달할 것이라는 필기설에 따라 정해졌다는 설이 있다.

중 화중화동은 예로부터 봉화산 아래 자연부락의 하나인 가운데 마을(中里)과 아랫마을(下里)의 글자를 따서 중하리로 칭하였는데 1963년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에서 서울시로 편입될 당시 주민의 건의로 ""자 대신 화목을 도모한다는 의미로 ""자를 넣자는 뜻에 따라 중화동으로 명명되었다.

상 봉상봉동은 조선시대부터 유래하는 上里鳳凰洞의 자연부락을 통합하여 上里자와 鳳凰洞자를 따서 上鳳里라고 붙인데서 유래한다.

면 목면목은 조선시대 이곳에 말목장이 위치한다하여 지명되었으며 1945815일부터 중계, 하계, 면목리 등이 합해져 면목동이 되었다.사가정아차산 벌판에 거주했던 조선시대의 학자인 서거정(세종 2성종19)의 호를 따서 사가정길이라 한데서 비롯되었다.

용마산용마산(348M)은 경기도 남양주군의 구리시와의 경계를 이루는 아차산의 최고봉이다. 북쪽의 북한산, 서쪽의 덕양산, 남쪽의 관악산과 함께 서울의 외사산을 형성하고 있는 이산은 예전에 용마가 나왔다하여 용마산이라 불리워졌다.

중 곡동네가 능말(능동)과 면목동의 가운데 자리잡고 있으므로 "가운데말", "간데말" 또는 한자음으로 "중곡"이라 하였다는 데서 유래한다.

군 자옛날 어느 왕의 일행이 거동하다가 마침 이곳 남일 농장터에서 묵게 되었는데 그날 밤 동행하던 왕비가 옥동자를 낳았으므로 이곳을 군자동이라 하였다고 전하며 지금도 이곳을 명리궁터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린이대공원인근에 어린이 대자연 공원인 어린이대공원('73.5.5)이 자리하고 있어 어린이대공원이라 지칭되었다.

건대입구역사 인근에 건국대학교가 위치함.

뚝섬유원지옛날 살곶이들이라고 하였으나 80년대 한강종합개발계획에 의해 조성되었으며 연면적 547,000(166천여평), 연인원 200만명의 시민이 이용하고 있는 뚝섬유원지가 있어 명명되었다.

청 담한강연안에 위치하는 마을로서 현재 청담동 105번지 일대에 옛날 맑은 못이 있었으며 현 134번지 일대의 한강변 물이 맑아 이 부락을 청숫골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붙여진 이름으로 일제때 청담리라 불리어졌고 이후 서울시에 편입되어 청담동으로 지칭.

강남구청청담·논현·삼성 등 3개동의 경계부근(삼성동 8번지)에 위치하고 인근 강남구청으로 인하여 강남구청역으로 명명.

학 동학동은 마을모양이 학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학실,학곡,학곡동으로 지칭하게 되었다.

논 현논고개라는 고개의 지명을 본떠서 만들어진 이름으로 현재 논현동에 위치하고 있는 천주교회 위치가 마루턱이 높은 고개였으며, 또한 강남우체국 위에서 반포아파트까지의 산골짜기 좌우로 벌판이 펼쳐져 논밭이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논현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반 포반포라는 지명은 마을로 흐르는 개울이 서리서리 굽이쳐 흐른다하여 서릿개, 즉 반포(蟠浦)라 하다가 변음되어 반포(盤浦)로 칭함. 일설에는 이곳이 상습 침수지역이므로 반포라고도 함.

고속터미널1976.9.1일 강북에서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이 이전하였고 3호선 고속버스터미널과 환승역으로 동일 역명 제정.

내 방방배동은 관악구와 서초구의 경계에 솟은 우면산을 등지고 있는 동리라는 뜻의 방배(方背)라 한데서 연유하며, 일설에는 동네 북쪽에 흐르는 한강을 등진() 모서리()란 뜻으로 방배동으로 불리워 짐. 현재 운영중인 지하철 2호선 방배역과의 혼돈을 피하기 위하여 방배동 안쪽에() 자리한다고 하여 내방이라 제정.

이 수이수(梨水)란 옛날 배나무를 많이 재배하던 마을 동쪽에 한강물이 흐른다고 하여 유래되었음.남 성남성동의 유래는 효성이 지극한 정조대왕이 수원에 있는 사도세자 능행시 행차길인 현재의 사당동 일대가 예전에 여시고개, 살피재 등으로 불리었으나 임금의 행차길이 이물스러운 지명이라 하여 여시고개를 남쪽의 큰 재라하여 남태령으로 고쳐부를 때 태령의 재 성()자를 따서 남성동이라 일컬었음.

숭실대입구(살피재)살피재 고개는 상도동과 봉천동 고개로서, 옛날 이곳은 수목이 울창하여 도둑이 많이 출몰하였던지라 이 재를 넘기 전에 사람들이 살펴서 가라고 하여 이름이 붙여짐.

상 도옛날 이곳에 상여꾼이 집단적으로 거주하여 상투골 이라고 칭하던 것에서 유래됨.

장승배기장승은 경계의 표시이기도 했지만 리()수를 적어 10리나 15리마다 세워둠으로써 이정표 역할을 하는 기능도 수행했고 특히 악귀를 막는 수호의 샤머니즘이기도 했다. 흔히 장승이 서있는 곳을 장승배기라 하는데 유래는 조선중기 정조가 뒤주 속에 갇혀 비통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한시도 잊지 못하고 수원의 묘소를 참배다니는 것을 잊지 않았는데 당시 나무숲이 우거진 이 곳에서 쉬기란 적적하기 그지없어 장승을 만들어 세웠다고 함.

신대방삼거리조선시대는 경기도 금천현 하북면 번대방리(樊大方理)였고 '50.3.15일 신대방동으로 개명. 신대방은 대방동 접경의 새로 생긴 마을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신대방동, 대방동, 상도3동의 삼거리에 위치하고 널리 알려진 지역명칭임.

보라매보라매란 순우리말로 생후 일년이내의 사냥을 위해 길들여진 매를 말하는데, 공군사관학교의 상징새가 보라매임. 보라매공원은 공군사관학교가 자리잡고 있던 곳으로 공군사관학교가 청주로 이전하고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되면서 공군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름을 보라매공원으로 하였음.

신 풍샛강을 경계로 여의도와 마주보고 있는 신길동은 조선시대에 영등포 나룻터가 있던 곳으로 신풍은 수원가도 이서(以西)의 지역을 관할하는 옛 동명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 림신대방동의 ""자와 신도림동의 ""자를 따서 대림동으로 명함.

남구로본래 구루지 마을과 각만이 마을, 새말, 주막거리, 옻우물약수터 등의 마을이 모여 형성되었으며, 옛날에 이곳에 아홉명의 노인이 살고 있었다는 전설에서 구로라는 지명이 유래함.

가리봉이 마을 주위 작은 산봉우리가 이루어져 마을이 되었다고 한데서 붙여졌다는 유래와 고을과 같은 의미를 갖는 "" 또는 갈라졌다는 뜻인 "가리"에서 유래가 있다.

철 산뒷산이 쇠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우두리(牛頭里)라고 불리다가 쇠와 철은 소리는 다르게 나지만 같은 뜻이기 때문에 철산으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광 명광명시는 경기도의 남서부 중앙에 위치한 수도 서울의 인접도시로 광명이라는 명칭은 다른 곳 보다 해와 달이 잘 비추는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됐다.

천 왕인근 주산이 굴봉이고 굴봉산 골짜기에 천왕사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에 절 아래 마을이라는 뜻에서 천왕골로 불려진데서 역명이 유래됨.온 수조선왕조 세종20(1438)경 서울 양천구와 부천 소사구의 접경지역에 위치한 이곳 부평도호부 일대에서 더운물이 솟아 나온 기록이 있어 온수골이라 칭하다가 1963년 서울시 조례 제276호에 의거 온수동으로 개칭한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음.

8호선역 명지 명 유 래

암 사암사동 산 23번지 일대에 신라시대에 절이 9개나 있어 구암사라 하였고 속칭 바위절이라 하였으므로 그 한자명으로 암사리라 한데서 연유하였음.

천 호원래 지명은 곡교리로 이곳이 인가 수천 호가 살만한 지역이 되리라는 풍수지리설에서 동명을 따온 것이다.

강동구청조선시대 고종32년 풍납토성 안쪽에 위치했다고 하여 성안말, 안말 또는 성내처로 부렸던 곳으로 현재의 이름은 강동구청이 역세권에 위치하고 있어 결정됨.

몽촌토성고대 삼한 때부터 이곳을 곰말이라고 했는데 곰말은 고어로 큰마을을 뜻하며 한자음으로 고쳐서 몽촌이 되었고 3세기경부터 5세기말까지 북쪽으로부터의 침공에 대비해 자연 구릉 상에 방어용 토성을 축성하여 현재까지 올림픽공원 내에 사적 제297호로 보존되고 있으며 역세권 인근에 위치하여 몽촌토성역이라 명명됨.

잠 실조선초에 양잠을 장려하기 위하여 국립양잠소격인 잠실도회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잠실이라 불리어졌다.

석 촌병자호란때 조선을 침입한 청군이 진지를 만들기 위해 돌을 옮겨다 놓아 이곳에 돌이 많게 되어 주민들은 돌이 많은 마을이라는 뜻으로돌마리라고 불렀다. 이것이 한자음으로 석촌으로 표기되고 현재의 석촌동이 되었다.

송 파예로부터 삼남(三南)에서 올라오는 물산의 집산지로 조선조 5대향시중의 하나로 교통의 요충지였던 송파는 언덕 위에 소나무가 푸르게 우거진 산 좋고 물 맑은 강변마을이었으며 이로부터"소나무가 푸르른 언덕"이라는 뜻의 松坡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가락시장가락동은 조선시대 가락골을 중심으로 띄엄띄엄 마을이 있어 자연부락 이름으로 불리어 오다가 을축년(1925) 대홍수때 한강이 범람하여 송파동 일대가 침수되자 그곳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여가히 살 만한 땅즉 좋은 땅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농수산물 종합도매시장이 1985.6.1 개장되어 서울시민에 신선한 야채와 과일, 어물, 축산물을 공급하고 있다.

문 정조선 중기 병자호란때 인조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가시다가 이곳 우물에서 물을 드시고 물맛이 매우 좋고 씨가 많이 산다고 하여 문씨의 자와 우물의 자를 합하여 文井이라 하였다.

장 지장지동은 잔버들이 많은 지역이라 잔버드리라는 설과 또는 마을이 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복 정복정동의 명칭은 복우물(福井)에서 유래한다. 구전에 의하면 큰 우물이 있었던 곳은 현 정수장 뒤인데 안골로 가는 길, 또는 길과 밭 사이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영장산 복정동쪽 상봉에 있는 칠성대의 감로천이 우물이라고 한다.

산 성남한산성은 백제시조 온조왕부터 13대 근초고왕 26년까지 도읍지였으며 광범위한 성곽은 이조 광해군 13년 외부침입에 대비하여 증축, 인조 4년에 완공하였으며, 인조대왕이 피신 45일간 병자호란을 겪은 곳이다. '98. 10.1 "남한산성"에서 "산성"으로 역명 변경.

남한산성입구남한산성은 백제시조 온조왕부터 13대 근초고왕 26년까지 도읍지였으며 광범위한 성곽은 이조 광해군 13년 외부침입에 대비하여 증축, 인조 4년에 완공하였으며, 인조대왕이 피신 45일간 병자호란을 겪은 곳이다. 역세권 내에 수원지법 성남지원 및 검찰청사가 있어 이용승객의 편의를 도모하고자 1998.10.1부로 남한산성입구(성남법원, 검찰청)역으로 병기하게 됨.

 

단대오거리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세초면 단대동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은행정이 논골, 금광리를 병합하여 단대리라 하고 중부면에 편입되었다. 1973년 시 승격 당시 탄리에서 남한산성으로 가려면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그 붉은 고개 밑이 되므로 단대골, 또는 던데, 단대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신 흥백제시대(기원 18) 시조 온조왕이 도읍지로 정한 하남위례성의 옛터로 통일신라시대(서기 660)에는 한산주 또는 남한주로 개칭하였고 1973.7.1 시승격과 동시에 신개발지로서 새롭게 발전을 도모하자는 뜻으로 신흥동으로 명하여 전래되고 있다.

수 진세종대왕의 7째 아들 평원대군이 사망하자 영장산 남쪽에 장사지내고 그 묘소를 관리하는 수진궁을 지었으므로 수진리라 불러왔는데 19737월 성남시로 되면서 수진동으로 바뀌었다.

모 란이북평양이 고향인 김창숙이 월남하여 예편하고 광주군수를 지낸후 1970년 당시의 광주군 들마면 하대원리에서 황무지 개간사업을 시작하여 동네가 형성되자 이북에 두고 온 어머님을 그리는 뜻에서 "모란"이란 지명을 사용하였다.

화계사 주지 수경 스님 3월 28일부터 오체투지 순례 / 뭇 삶 아픔 껴안고 온몸 던지다


 

뭇 삶 아픔 껴안고 온몸 던지다

 

“수경 스님 3월 28일부터 오체투지 순례
“공주 신원사에서 임진각까지 230㎞ 여정
“가진 것 내려 놓고 평화와 생명 청할 것”
[2009년 03월 30일 월요일]
 

“생명의 소리를 따라 죽음과 절망의 소리를 지워버리고,

우리의 왜곡된 삶을 성찰하며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국민에게 평화와 생명의 소리를 청하고자 합니다.”


3월 28일 다시 오체투지 순례에 나선 화계사 주지 수경〈사진〉 스님이 참회로서 이 땅에 희망이란 씨앗을 심겠노라 발원했다.

 

그리고 오체투지는

“오로지 살고자 하는 길이자 기도”

라며 목숨 건 순례를 예고했다.

 

수경 스님은 먼저 자신의 삶을 반추했다.

스님은

“40년 스님 노릇을 하며 정도의 길을 걸어왔나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진솔하게 계를 다 지켰나?

체면 차리고 직업으로서 스님 노릇만 해온 것 같다.

감당이 되지 않았다”

고 자신을 책했다.


계속된 스님의 고백은 솔직했다.

스님은

“자기합리화 하고 대접받으며 살아갈 것인가.

사회에서 성직자로서의 길이 무엇인가 몇 개월 씨름했다”

“그 동안 산에 사는 도둑이었더라”

고 참담한 심정을 털어놨다.

 

스님은 환경보호라는 시대적 요구에 뭇생명과의 상생을 주제로 불교적 대안을 제시하려던 환경운동에 대한 부담도 상당했다고 전했다.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서 대접 받았던 삶이라고 참회했다.

그러나 스님은

“대접 받으면 스님으로서는 끝이다”

라며

“적당히 타협하며 살지 않겠다.

마지막 삶을 치열하게 살고자 한다”

고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그리고 오체투지 순례가 사회와 뭇생명들의 생명과 평화를 기원하며, 자연과 사람의 만남과 화해, 사람과 사람의 만남과 상생, 사회와 사회의 만남과 공존을 염원하는 기도임을 다시 새겼다.

 

수경 스님은 불교계에도 애정 어린 시선을 담고 비판의 날을 세웠다.

먼저 잘잘못을 드러내놓고 참회하며, 시대의 아픔을 함께해야 미래를 담보할 수 있다고 경책했다.


스님은

“국토를 파헤쳐 경제난을 극복하겠단 대통령을 초대,

호텔에서 법회를 하는 것이 과연 불교인가”

라고 반문한 뒤

“성직자가 왜 필요한지,

그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다. 암담하다”

고 토로했다.

 

스님은 또

“조계종은 지난해 정부를 비판했던 사실을 잊고 하루아침에 돌변해 정부의 홍보기관까지 한다”

“지역 사찰이 제 역할을 못해 목사와 신부가 그 지역의 어른이 된 현실에서 본말사 주지는 정부 예산 많이 가져오는 것이 능력으로 비춰지고 있다.

참회해야 한다”

고 개탄했다.

 

그래서 수경 스님은 다시 땅에 온몸을 던져 희망의 길을 묻고자 한다. 모든 문제들이 정리되지 않으면 스스로가 견딜 수 없다고 했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자 목숨 건 순례인 것이다.

상구보리 하화중생하는 불교가 되길 바라는 염원인 것이리라.


“이런 고민들을 안고 남은 생을 후회 없이 살아가려는 노력입니다.

그 기도가 오체투지입니다.

조금이라도 양심적으로 사는 사회가 되길 기원하는 기도입니다.

시대의 등불, 고통을 함께하는 종교가 바로 불교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화계사 주지 수경 스님과 전주 평화동 성당 문규현 주임신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대표 전종훈 신부 등 순례단은 3월 28일 공주 신원사 중악단에서 임진각까지 오체투지에 나섰다.

 

순례단은 천안, 평택, 오산, 화성, 수원, 의왕, 안양, 과천, 서울을 거쳐 임진각까지 약 230km의 거리를 하루 4km씩 삼보일배로 74일 동안 생명과 평화, 상생의 기도를 올릴 예정이다.

 

“함께하는 수많은 생명과 평화의 작은 몸짓들과 함께 길을 만들면서 가고자 합니다.

그 길에서 생명과 평화를 위한 작은 소리와 몸짓이 세상을 바꾸는 밀알이 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오체투지 순례단 기도문 중)

 

 

행복해지는 길을 찾아 나서다

 

<특별기고>오체투지 순례 떠난 수경 스님
 
 

 

 

3월 28일 공주 신원사 중악단에서 천고제를 시작으로 임진각까지 230여 km의 오체투지 순례에 나선 화계사 주지 수경<사진> 스님이 본지에 특별 기고문을 보내왔다.

 

스님은 수행자의 한 사람으로서 대접받던 삶을 반추하고 자신을 더 낮춰 세상을 바라보고자 오체투지에 나선다는 내면의 고백을 한 자 한 자 간곡히 써내려갔다.

 

공업 중생으로서 모든 생명이 평화롭고 서로를 연대하고 배려하는 세상을 무한히 자신을 낮춰가며 길 위에서 찾고자 하는 스님의 염원을 게재한다.

 

다음은 수경 스님 기고문 전문.

 

오체투지 기도 순례를 떠나며

 

다시 길 위에 섭니다.

나의 온 숨을 대지에 바치는 오체투지 순례에 나섭니다.

나의 숨결이 바람결을 따라 눕고, 나의 육신이 물처럼 대지를 흐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누구에게나 꿈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든 그 꿈의 궁극은 ‘행복’일 것입니다.

나도 행복해지기 위해서 출가를 했습니다.

하지만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나이가 벼슬이라고, 절집 밥을 축낸 햇수가 늘면서 대접 받을 일이 많아졌습니다.

까닥 정신을 놓으면 수행자로서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게 생겼습니다.

하여 나는 ‘환계(還戒)’의 심정으로 오체투지의 길을 떠납니다.

 

저의 허물을 제대로 보고 최소한 제 자신을 속이지는 말자는 참회의 기도를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바로 세울 수 있다면, 시절 인연으로 고통 받는 여리고 약한 사람들과 말 못하는 생명의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건 오로지 ‘돈’을 찾아 헤매는 벌거벗은 욕망입니다.

모두가 ‘경제 위기’ 타령입니다.

죽겠다고 아우성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사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위기는 모두가 강남에 최고급 아파트를 사고, 모든 아이들이 국제중, 특목고, 명문대에 진학해서 대기업에 취직해야만 해결될 성질의 위기입니다.

‘욕망의 위기’인 것입니다.


만약 이명박 정부가 전국토를 공사판으로 만들어서 일시적으로나마 현재의 경제 위기를 넘기면 청년실업, 비정규직, 빈부 양극화, 빈부의 대물림 문제가 해결될까요?

 

그렇게 믿는다면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사회적 모순을 비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승자 독식’ 구조를 인정한 상태에서 내가 승자가 되지 못한 푸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문제의식’은 없고 ‘위기의식’만 난무하는 한국 사회


지금 우리 사회는 ‘위기의식’만 팽배할 뿐 위기의 원인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습니다.

최소한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금도도 없습니다.

도덕과 윤리의식의 부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 전 부문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진짜 위기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요.

진보와 보수, 여야, 대통령과 국민 모두가 서로를 속이고 있습니다.

한 예로, 청년 실업의 문제는 현 정부의 잘못이 아닙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더욱 아닙니다.

 

모든 대학이 모든 학생들에게 최고의 경쟁력을 갖추게 한다고 칩시다.

모두가 토익 점수 만점이라고 칩시다.

결과는 현재 상태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문명사적으로 당연히 도래할 상황에 놓인 것입니다.

 

‘더 벌어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식과 규모의 조정을 통해서 삶 자체를 재편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부자도 대기업도 불행해집니다.

극빈층이 늘어남으로써 자신들의 부를 지속시킬 물적 토대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든 국민을 ‘부자 만들어 준다’고 한 이명박 대통령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판을 합니다.

낯간지러운 일입니다.

서로 속이지 않았습니까?

 

설령 모두 부자가 되지는 못한다 치더라도 최소한 부자와 기업이 잘 되면 떡고물이라도 많이 떨어지겠지 하고 기대했기 때문에 이명박이라는 분이 대통령에 당선된 겁니다.

어차피 지킬 수 없는 약속이라는 걸 알았으면서 이제 와서 비판을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비판의 초점도 빗나갔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비판 받아야 할 점은 정직성입니다.

막상 대통령이 되고 보니 현재의 위기는 문명사적 전환의 국면에서 필연적으로 닥칠 상황에 처한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하고, 가진 자와 대기업의 도덕적 책무 이행과 양보를 전제로 다수의 국민에게 고통 분담을 호소하고 동의를 구했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사회적 합의이고 국민 통합의 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는커녕 눈과 귀를 닫고 오직 돈을 풀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언론과 시민 단체, 지성계와 종교계의 책무가 중요한데도,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으로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기에 급급합니다.

그 비판이 정당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대안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 나라 지성계에 원로가 있는지도 의문이 듭니다.

있다면 지난 촛불 정국의 정점에서

“이제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자.

이제부터 우리 내면의 혁명을 이루자.

그래서 세상을 바꾸자.

그것을 위해 써야 할 에너지를 소진시키지 말자”

하고 설득해야 했습니다.

 

소위 자기 진영으로부터 욕을 먹더라도 어른다운 곡진함으로 길을 열어 보였어야 했습니다.


종교계와 성직자는 어떻습니까.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불교계만 보자면 시대의 고통과 온 생명(중생)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노력이 없습니다.

 

한국 불교는 부처님 가르침으로부터 너무 멀어졌습니다.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길과 반대로 갔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 또한 이러한 비판을 받아야 할 당사자의 한 사람임을 잘 압니다.

 

‘부드러운 관계’, 그것이 사람의 길


이러한 문제의식을 안고 오체투지를 떠납니다.

우선 수행자로서 잘못 살아 온 허물을 참회하고 나를 바로 세우는 일이 시급해서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공업 중생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진정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모색을 하는 작은 계기라도 만들고 싶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단 한 번이라도 오체투지를 경험해 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평화적 시위’ 차원이 아닙니다.

지난해에 지리산에서 계룡산까지 오체투지를 통해 지렁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절절히 느낀 바는, 누구나 알고 있는 소박한 삶의 진실입니다.

 

사람이 별 것 아니라는, 산다는 것이 별 것 아니라는 새삼스런 자각이었습니다.

그러한 ‘해방 체험’을 공유하자는 것입니다.

자유와 행복의 의미를 정직한 몸의 언어로 새겨 보자는 것입니다.


좀 거창하게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찾아서 오체투지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거창할 게 없습니다.

추상적인 길, 실현 불가능한 이상적인 길도 아닙니다.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현재보다는 덜 폭력적으로만 바꾸어도 세상은 달라질 것입니다.

최소한 나의 행동이 상대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 더 가지기 위해 상대를 짓밟지 않는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아름답고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길이 아니면 그 길을 어디에서 찾을 것입니까. 나는 세상의 모든 성현과 종교의 가르침이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 믿음을 튼튼히 하기 위해 오체투지의 길을 나섭니다.

모두들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2009년 봄
화계사 주지 수경 합장

   최호승 기자 sshouto@beopbo.com

 

MS-애플의 성장 뒤에 숨겨진 “불편한 진실”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컴퓨터는 미국을 대표하는 IT 기업의 신화라 할만하다. 그러나 두 회사는 공통적으로 외부에 숨기고 싶은 과거사가 존재한다.

양 회사는 성장의 시기에 자체로 기술을 개발하기 보다는 경쟁회사의 기술을 은밀히 이용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회사가 인정해야할 '불편한 진실'이다.

이런 사실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게이츠, 스티브 잡스의 실리콘 밸리 전쟁(Pirates of Silicon Valley)’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두 회사의 창업자들을 위대한 인물보다는 성공에 눈이 탐욕스런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실에 근거해 제작된 영화는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의 성공을 칭송하는 이들에겐 충격적으로 들릴만하다.

-스티브, 출생연도 같지만 성장 환경은 정반대

마이크로소프트의 창립자 게이츠. 애플컴퓨터의 설립자 스티브 잡스.

인물들은 워낙 유명한 탓에 굳이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알려진 인물이다. 공교롭게도 사람은 1955년생으로 출생연도가 같다.

그렇지만 빌은 비교적 유복한 집안에서 스티브는 출생하자마자 버려진채 입양아로써 각자 정반대되는 환경에서 성장했다.

둘의 공통점은 70년대에 벤처를 설립했다는 . 그러나 스티브가 공동 창업자인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세계 최초의 퍼스널 컴퓨터인 애플1’ 개발, 선주문으로 50대를 팔면서 행운을 먼저 거머쥔다.

이후 인텔로부터 25만달러 투자받아 애플컴퓨터사를 설립하며 승승장구하게 된다.

이후 딸의 이름을 붙인 리사라는 차기 버전을 선보이며 일약 스타기업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반면 빌은 스티브 발머와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차리고 알테어사와 알테어 컴퓨터 언어 개발해 공급하기로 계약을 체결한다.

성장의 기초를 마련했지만 애플컴퓨터와 비교하기에는 마이크로소프트는 동네 구멍가게 수준.

둘은 운명적으로 1977 개최된 샌프란시스코 컴퓨터 박람회 서로 마주친다. 그렇지만 빌은 급성장하는 애플 컴퓨터와 제왕처럼 직원 위에 군림하는 스티브를 바라보는 것으로만 만족해야만 했다.

이후 스티브와 빌은 향후 IT 트랜드가 운영체제가 것으로 전망하고 소프트웨어 개발에 나서게 된다.

먼저 빌은 1980 IBM 찾아가 애플컴퓨터를 견제할 있다고 설득하고 퍼스널 운영체제 공급을 약속한다.

, 개발된 운영체제가 없었음에도 IBM 중역을 거짓말로 속이며 계약을 체결한 .

빌은 서둘러 5만달러의 헐값에 다른 회사의 운영체제를 사들여 완성도를 높이는 작업에 들어갔다.

뒤쳐졌지만 스티브도 애플컴퓨터 사내에 매킨토시 애플2’ 개발부를 이중화해 상호 경쟁을 시키며 운영체제 개발에 나섰다.

스티브-, 경쟁적으로 제록스 기술 도용

스티브는 제록스가 개발했지만 거의 사장된 그래픽 인터페이스기술과 최초로 상용화된 마우스 무단 도용하여 운영체제 개발에 들어간다.

스티브는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을 3 이상 잠을 못자게 하는 폭군의 추악한 면모를 보이게 된다.

이로 인해 얼마 창립자임에도 애플컴퓨터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기도 한다.

애플컴퓨터의 운영체제 개발 사실을 알게된 빌은 회사 규모 자금, 인력 등에서 경쟁할 없음을 직감하고 과감히 애플컴퓨터에 합류하는 위장 전입을 시도한다. 

스티브의 눈을 감쪽같이 속이며 제록스가 개발한 그래픽 인터페이스 마우스기술을 역으로 훔쳐내는데 성공한 .

스티브는 뒤늦게 사실을 알고 빌에게 같은 화를 내지만, 빌은 당신들이 먼저 제록스로부터 기술을 훔쳐낸 이라고 반박한다.

, ‘맥킨토시 제록스의 그래픽 인터페이스 도용한 것이 도스 맥킨토시 것을 차용한 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논리.     

대목에서 빌의 약삭빠르고 교활함을 인지할 있을 정도다.

빌은 순간의 교활한 선택으로 전세계 최고의 부자로 올라섰지만 도덕적 비판에선 자유로울 없다.

또한 영화에서 애플컴퓨터 마이크로소프트의 신화에 대한 동경심이 여지없이 허물어질 밖에 없다.

성공을 위해 서로 경쟁적으로 제록스의 기술을 훔쳐낸 일과 서로 속고 속인 사실은 현재 전세계 금융대란의 원흉으로 지목받고 있는 미국의 성장 위주 탐욕과 다름없음이 분명하다.

<데일리그리드>

김보성 기자   kbs@dailygrid.net


[60년째 제자리 한국 철도]


[60년째 제자리 한국 철도]

유럽선 작은 마을까지 철도로 연결… 유레일 패스 한장이면 어디든 OK
한국철도는 대부분 일제때 지은 것… 그나마 기차 안다니는 지역 더 많아

입력: 2009-02-11 18:32 / 수정: 2009-02-12 09:55

[T옴니아 와이드 리뷰] 똑똑하고 쓰기 쉽고…생각대로 다 된다


기사입력 2008-12-08

 

삼성전자와 SK텔레콤이 스마트폰 시장 활성화를 위해 야심차게 내놓은 ‘T옴니아(SCH-M490)’가 지난주 전격 출시됐다. 일단 초기 반응은 뜨겁다. 출시를 손꼽아 기다리던 스마트폰 마니아는 물론이고 일반 사용자까지 관심을 보이며 하루에 1000대가 넘는 제품이 팔리고 있다. 국내에 출시된 스마트폰으로는 이례적인 출발이라는 평가다. 지금까지 국내에 출시된 모든 휴대폰을 망라해 가장 뛰어난 사양과 기능을 자랑하는 T옴니아. 과연 국내 휴대폰 시장의 지각변동을 이끌 ‘전지전능’한 제품이 될 것인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스마트폰의 경계를 넘어서다…느린 속도, 부족한 배터리 용량 아쉬움>

“스마트폰이요? 좋은 것 같기는 한데, 어려워요. 첫 화면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니까요….”

국내 대부분의 휴대폰 사용자가 느끼는 이 같은 인식은 그동안 국내 스마트폰 시장 활성화의 가장 큰 장벽이었다.

T옴니아는 이런 소비자의 고민과 인식을 바꾸려는 삼성전자와 SKT의 고뇌가 담긴 제품이다. 일반 휴대폰과 비슷한 사용자인터페이스(UI) 구축에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하다. 또 운용체계(OS)인 윈도모바일 6.1 프로페셔널을 기반으로 스마트폰 기능의 강점은 더욱 강화했다.

스마트폰 커뮤니티인 마이미츠의 박정환 운영자는 “스마트폰이 소수의 마니아층에만 머물렀던 가장 큰 이유가 일반 휴대폰에 비해 어려운 사용방법”이었다며 “T옴니아의 UI는 일반 휴대폰과 비슷해 일반 사용자도 쉽게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익숙한 기본 화면=T옴니아 이전의 스마트폰은 일반 휴대폰에 비해 다소 복잡하고 어렵게 화면이 구성돼 있던 것이 사실이었다. 2인치급의 작은 화면에 전화와 메시지, 일정을 비롯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표시하고, 플래시에 기반을 둔 그래픽 화면 전환 기능도 없어 ‘밋밋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T옴니아의 ‘기본 화면’은 일반 휴대폰 사용자도 익숙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단순화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또 대화면의 풀터치 기반으로 직관적인 사용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졌다. 일반 휴대폰을 사용하는 소비자도 손쉽게 이용할 수 있다.

디자인은 지구 모양의 원형 안에 날짜와 시간, 외곽에는 오늘의 날씨가 표시된다. 이 화면이 지루하다면 설정을 다시해 윈도모바일 기본 화면을 비롯, 네 가지 모양을 선택할 수 있다. 스마트폰의 강점인 일정관리도 기본 화면에서 곧바로 이용할 수 있다.

◇터치로 간편하게 화면 전환=기본 화면을 왼쪽 방향으로 드래그하면 12개의 고정형 ‘메뉴 화면’으로 이동할 수 있다. 가로 석 줄, 세로 넉 줄로 구성된 메뉴 화면은 일반 휴대폰과 다를 바 없다. 또 ‘프로그램’과 ‘설정’ 메뉴를 제외한 10개의 메뉴는 사용자가 임의로 구성할 수 있다. 특히 ‘작업전환기’는 실행 중인 프로그램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속도 향상을 위해 일부 프로그램을 선택, 간편하게 종료할 수도 있다.

메뉴 화면을 다시 한번 드래그하면 21명의 사진과 연락처를 등록할 수 있는 ‘전화번호부 즐겨찾기’ 화면으로 이동한다. 사진으로 상대를 확인할수 있어 편리하다.

◇위젯과 다양한 무료 서비스 결합=기본 화면의 오른쪽 하단에 있는 ‘위젯’ 화면을 선택하면 더욱 다양한 서비스를 만끽할 수 있다. 특히 SKT가 무료로 제공하는 뉴스와 날씨를 비롯해 정보이용료가 무료인 증권시황, 멜론 등 50여개의 기능을 사용자가 자유롭게 구성할 수 있다. 증권시황은 코스피, 코스닥, 환율은 물론이고 해외 증권시황까지 실시간으로 업데이트가 가능하며, 관심종목을 5개까지 등록, 주가를 확인할 수 있다. 또 하루 세 번씩 업데이트되는 뉴스와 함께 음악 서비스인 멜론도 원터치로 이용할 수 있다.

일반 휴대폰은 물론이고 이전 스마트폰은 여러 번의 설정과 메뉴 선택 과정을 거쳐야 하는 작업을 위젯을 활용하면 터치 한 두 번으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풀브라우징도 손색 없어=화질이 뛰어난 인터넷 풀브라우징 기능도 만족스럽다. 브라우저는 인터넷익스플로러(IE)와 오페라, 웹서핑 3종이 기본으로 제공된다. 3.3인치 WVGA(800×480) 해상도의 고선명 디스플레이여서 인터넷 화면를 확대하지 않더라도 글씨를 읽기에 큰 무리가 없다. 풀브라우징 서비스에 최적화하기 위해 해외에 출시된 옴니아(3.2인치, WQVGA)보다 스펙을 강화한 것이 효과를 발휘했다. SKT와 삼성전자 측은 풀브라우징을 스마트폰 확산을 위한 핵심 애플리케이션으로 인식하고 기능을 대폭 강화했다고 밝혔다.

여기에 와이파이(Wi-Fi) 기능도 지원, 비싼 무선 데이터 망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는 것도 큰 강점이다. 두 손가락을 화면에 대고 벌리거나 좁히면서 화면 크기를 조절하는 ‘멀티터캄를 지원하지 않은 것이 아쉬운 점이다.

◇멀티미디어·오피스 기능도 막강=음악과 동영상 감상 등 멀티미디어와 오피스 기능도 돋보인다. 동영상은 DivX 등 다양한 파일 형식을 지원하는 것은 물론이고 컴퓨터에 있는 파일을 ‘복사’하는 방식으로 간편하게 파일을 주고받을 수 있다. 특히 속도가 떨어지는 PC 싱크 기능을 사용하지 않고 외장형 저장장치로 인식시키면, 800MB 정도의 영화 한 편을 5분 정도면 복사할 수 있다. 여기에 화질 개선 칩도 장착, 동영상 데이터 처리 시 버퍼링을 최대한 줄였다. 또 외부 조도에 따라 화면 밝기를 자동으로 조절하는 기능도 채택됐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워드·엑셀·파워포인트 등의 파일도 자유자재로 읽고 편집할 수 있어 업무용으로 사용하는 데도 큰 무리가 없다. 워드와 엑셀 파일은 T옴니아에서 편집까지 가능하고 파워포인트 파일은 뷰어만 제공한다.

정영훈 PQI넷 사장은 “윈도모바일 기반의 다양한 컴퓨터 작업은 물론이고 일반 사용자도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구성 등이 가장 큰 장졈이라며 “T옴니아 하나로 다양한 엔터테인먼트와 업무에 사용하기 적합하다”고 말했다.

◇느린 반응 속도 아쉬워=스마트폰용 CPU로는 최강급인 마블의 806㎒ CPU와 128MB의 메모리(RAM)를 탑재했지만 일반 휴대폰에 비해서는 반응 속도가 느리다. 워낙 많은 기능을 구현하다보니 가끔씩 메뉴 이동이나 기능 실행이 느려진다. 또 여러 개의 프로그램을 동시에 실행하거나 메뉴를 여러 번 이동할 때 화면이 일시적으로 정지하는 ‘프리짱 현상도 나타났다. 삼성전자 측은 “동영상 등 데이터 처리가 많은 프로그램을 실행하거나 뉴스, 날씨, 푸시e메일 등 데이터 업데이트를 자동으로 설정해 놓았을 때 일시적으로 속도가 늦어지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전원을 켤 때 기본 화면이 나타나기까지 1분여의 시간이 걸렸다. 햅틱폰이 30여초가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일반 휴대폰에 익숙해 있던 사용자는 ‘느리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배터리 하루도 못 가=다양한 기능에 매료돼 구매한 사용자라면 배터리 용량도 불만스러울 듯하다. 배터리 용량이 1440㎃ 로 1000㎃ 수준인 일반 휴대폰보다 상당히 크지만 풀스크린으로 많은 기능을 구현하게 되면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삼성전자가 지난 7월 출시한 스마트폰 ‘울트라메시징Ⅱ(SCH-M480)’의 용량(1480㎃)보다 적다.

디자인 과정에서 크기에 비례하는 배터리 용량을 일부 포기한 것으로 해석된다.

동영상 재생이나 풀브라우징을 이용하니 하루종일 여유롭게 사용하기가 힘들었다. 전화는 물론이고 다양한 데이터 처리 기능을 선호하는 사용자라면 항상 여분의 배터리를 충전해 가지고 다녀야 안심이 될 듯하다.

<닷새 만에 판매 6000대 돌파…당분간 인기 이어질 듯>

T옴니아는 출시 이전부터 SKT 매장은 물론이고 인터넷으로 사전 예약이 몰리면서 돌풍을 예고해 왔다. 이러한 소비자의 관심은 초기 판매대수에서도 여실히 나타났다. 하루에 1000대가 넘는 제품이 팔려나가고 있다.

4일 SKT 관계자에 따르면 “본격 출시된 지난달 28일부터 이달 3일까지 닷새간 6000대가 넘는 제품이 개통됐다”며 “이전 스마트폰의 초기 판매대수와 비교할 수 없는 이례적인 판매 추이”라고 말했다.

4Gb 제품이 96만8000원인 초고가의 휴대폰인데도 일반 사용자는 물론이고 얼리어답터를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또 스마트폰 마니아들도 이 같은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 코엑스 SKT 매장에는 하루에 20여대의 T옴니아가 입고되고 있지만, 연일 매진 사례를 이어가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아직까지는 얼리어답터와 마니아 층을 중심으로 사전 예약 판매가 몰리고 있는 것”으로 분석했으며 “본격적인 판매 추이는 이 같은 수요가 어느 정도 끝나는 이달 중순 이후부터 판가름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편 이달 중순 출시 예정인 16Gb 용량의 ‘M495’를 기다리는 수요도 많은 것으로 알려져 올해 말까지 T옴니아의 열기는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햅틱폰 등으로 강점을 이어온 터치 UI에 강력한 성능까지 더해진 T옴니아의 인기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기대했으며 “TV·온라인 광고와 다양한 오프라인 이벤트를 펼쳐 T옴니아의 인기를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양종석기자 jsyang@etnews.co.kr
 

독하게 독학한 제2의 미네르바들


» “독하게 독학한 제2의 미네르바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강호에 황톳바람이 인다. 검객의 칼날이 예사롭지 않다. 잠깐 허공을 갈랐을 뿐인데, 주변의 허수아비들은 하나둘씩 쓰러진다. 새로운 고수의 출현이다. 이름하여 ‘경방고수’(다음 아고라 경제토론방의 고수). 백성들은 탄탄한 논리와 정보, 윤리적 자본주의관을 갖춘 그들의 신도가 되기를 마다 않는다. 광케이블을 타고 공간을 넘나드는 이들은 우리 시대의 ‘모피어스’이기도 하다. 그들이 묻는다. “네가 있는 곳은 매트릭스다. 허상의 세계다. 언제까지 당하고만 살 것인가, 아니면 매트릭스를 넘어 현실의 세상인 시온으로 발을 내디딜 것인가.”

경방이 배출한 최고의 스타 ‘미네르바’는 실제로 지난 11월13일 올린 글에서 이렇게 썼다. “1차 타격은 역시, 소득 5분위 가운데 가장 밑바닥 계층부터 지금 허리케인이 몰아치고 있다. … 다만, 이런 구조적 매트릭스 쳬계에 대한 시각이 없이 매트릭스 안에서 사육만 당하고 있었다면?”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게 자신들을 둘러싼 구조를 인식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또 다음 아고라에서 ‘미네르바’와 함께 경방고수로 군림하고 있는 ‘SDE’가 최근 ‘서지우’라는 필명으로 낸 단행본 <공황전야>는 이렇게 시작한다. “대공황의 원인은 대중이 경제를 너무 몰랐기 때문이다.” 찰스 킨들버거 미 매사추세츠공과대학 교수(경제학)의 말이다. 황혼녘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듯 경방고수들이 최근 비상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매트릭스에 갇혀 사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나타난 ‘선지자’, 경방고수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네티즌 추천받아 ‘경방고수’ 인터뷰

<한겨레21>은 다음 아고라 토론방과 <인터넷 한겨레> 토론방 ‘한토마’에서 경방고수로 통하는 이들을 직접 만나거나 전화·전자우편으로 인터뷰했다. 각 토론방에는 “이 사람이 경방고수”라고 추천하는 네티즌의 글이 많은데, 복수의 추천을 받은 논객들을 경방고수로 보고 접촉을 시도했다. 이들 가운데 ‘미네르바’는 끝내 응답하지 않았지만, 그에 못지않은 필명을 떨치고 있는 ‘SDE’ ‘상승미소’ ‘헝그리울프’ ‘양원석’(이상 아고라 필명), ‘명사십리’ ‘마포강변’(이상 한토마 필명) 등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경방고수들의 가장 큰 특징은 이 분야에 대한 학문적·직업적 기반이 없다는 점이었다. ‘SDE’는 금융 쪽은 물론 일반 기업의 근무 경력도 없다. 그는 학부에서 박사 과정에 이르기까지 줄곧 공학을 공부했고 지금도 관련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대운하 1천조설’을 제기하며 한때 경찰의 수사선상에까지 오른 ‘명사십리’ 또한 마찬가지다. 다음 아고라 경제토론방과 <인터넷 한겨레> 한토마를 오가며 정부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해온 그는 서울에서 부동산 상담을 하면서 전자상거래 회사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토목공학을, 대학원에서는 종교철학을 공부했다. ‘양원석’은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사회복지사고, ‘헝그리울프’는 동시통역사다. ‘상승미소’가 그나마 예외였는데, 경영학을 공부한 그는 현재 보험회사의 라이프플래너다. 경방고수 대부분이 자생적 비주류 비판경제론자들인 셈이다.

강호에 황톳바람이 인다. 검객의 칼날이 예사롭지 않다. 잠깐 허공을 갈랐을 뿐인데, 주변의 허수아비들은 하나둘씩 쓰러진다. 새로운 고수의 출현이다. 이름하여 ‘경방고수’(다음 아고라 경제토론방의 고수). 백성들은 탄탄한 논리와 정보, 윤리적 자본주의관을 갖춘 그들의 신도가 되기를 마다 않는다. 광케이블을 타고 공간을 넘나드는 이들은 우리 시대의 ‘모피어스’이기도 하다. 그들이 묻는다. “네가 있는 곳은 매트릭스다. 허상의 세계다. 언제까지 당하고만 살 것인가, 아니면 매트릭스를 넘어 현실의 세상인 시온으로 발을 내디딜 것인가.”

경방이 배출한 최고의 스타 ‘미네르바’는 실제로 지난 11월13일 올린 글에서 이렇게 썼다. “1차 타격은 역시, 소득 5분위 가운데 가장 밑바닥 계층부터 지금 허리케인이 몰아치고 있다. … 다만, 이런 구조적 매트릭스 쳬계에 대한 시각이 없이 매트릭스 안에서 사육만 당하고 있었다면?”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게 자신들을 둘러싼 구조를 인식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또 다음 아고라에서 ‘미네르바’와 함께 경방고수로 군림하고 있는 ‘SDE’가 최근 ‘서지우’라는 필명으로 낸 단행본 <공황전야>는 이렇게 시작한다. “대공황의 원인은 대중이 경제를 너무 몰랐기 때문이다.” 찰스 킨들버거 미 매사추세츠공과대학 교수(경제학)의 말이다. 황혼녘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듯 경방고수들이 최근 비상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매트릭스에 갇혀 사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나타난 ‘선지자’, 경방고수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다양한 이력 가진 30·40대 많아

비전공자들의 경제 고수 등극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SDE’는 ‘비선형 확률제어’를 공부했다. 주로 로켓·미사일·우주항공 등에 적용되는 학문이다. 정해진 공간 안에서 불특정한 변수의 입력값이 달라질 때 결과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연구한다. 이런 모델 연구에는 수학이 중요한 도구로 쓰이는데, 결과적으로는 계량경제학이나 파생금융과 유사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동시통역사인 ‘헝그리울프’는 외환위기 때 금융 분야에서 일했다. 동시통역을 하려면 관련 분야를 충분히 이해해야 했다. 외신을 중심으로 경제 공부를 꾸준히 했다.

그러나 고수가 된 진정한 비밀은 성실성과 천재성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상승미소’는 경방고수 가운데 유일하게 구체적 신원을 기꺼이 공개했다. 푸르덴셜생명 라이프플래너인 이명로(39)씨다. 그는 아침 5시30분에 일어나 6시30분에 사무실에 도착한다. 2시간여 동안 집중적으로 블로그와 토론방에 올릴 글을 쓴다. 오전 10시부터 저녁 7시까지 회사 고객들을 시간 단위로 만난다. 지방 출장도 잦다. 상담이 끝나면 다시 사무실에 돌아와 저녁 9시까지 다음날의 업무를 준비한다. 밤 10시께 집에 들어와 2시간 정도 인터넷을 검색한다. 국내 언론은 물론 <월스트리트저널> 등 외국 언론과 국내외의 경제 관련 ‘파워블로그’를 찾아다닌다. 잠은 5시간 정도 잔다. “하루 종일 나 자신과 싸운다”고 이씨는 말했다.

» 다음 아고라 경제방 게시글 수

‘SDE’는 <한겨레21>과 인터뷰 때 1997년 이후 한국 경제의 주요 사건을 줄줄이 기억해냈다. 따로 메모를 보지 않고서도 거침없이 연도와 사건과 숫자를 이야기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98년 12월 대우전자와 삼성자동차의 빅딜안이 나왔는데, 나는 찬성했어요. 당시 대우차는 90조원의 부채를 지고 있었거든요. 외환위기 때 한국의 부실채권이 120조원이었는데, 대우가 파산하면 그에 육박하는 부채가 발생할 수도 있었지요. 결국 99년 4월에 빅딜이 무산됐어요. 그해 7월에 대우는 4조원의 협조융자를 받았고 8월에는 결국 파산했지요….” 비선형 확률제어를 전공하는 그의 머리에는 지난 10년에 걸친 주요 경제 사건과 논쟁의 세밀한 결이 두루 입력돼 있었다.

제아무리 천재적이고 성실하다 해도 내공을 쌓는 데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경방고수의 대부분은 30·40대였다. ‘SDE’는 정확한 나이를 밝히길 꺼렸지만, 여러 경력으로 볼 때 40대 초·중반으로 추정된다. ‘명사십리’와 ‘마포강변’은 40대 후반, ‘헝그리울프’는 40대 초반, ‘상승미소’는 30대 후반, ‘양원석’은 30대 초반이었다.

이들의 연륜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은 대중적 글쓰기의 연습 과정이다. ‘명사십리’는 조세 관련 전문지 기자 생활을 시작하면서 경제 쪽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는데, 각종 예규와 판례 등을 쉬운 말로 바꿔 기사화하는 3년의 기자생활 동안 글쓰기의 바탕을 익혔다. ‘상승미소’도 2000년 무렵부터 <오마이뉴스> <서프라이즈> 등에 글을 써왔다.

‘SDE’는 가장 혹독하게 글쓰기를 연마한 경우다. 경제 분야 글쓰기 이력이 벌써 10년을 넘겼다. 1996년 말부터 PC통신 하이텔에서 활동했다. 이듬해 7월 ‘기아사태’가 났을 때, 한국의 외환위기 가능성까지 거론하며 기아자동차를 다른 대기업에 넘기는 데 반대했다. 결국 몇 달 못 가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그는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 뒤로도 꾸준히 온라인을 통한 글쓰기를 계속했다. “2005년 이후에는 한국 사회의 경제 성격을 놓고 좌파 논객들과 논쟁했다”고 한다. 부동산 투기 대책으로 나온 민주노동당의 세금정책을 비판하는 논쟁도 벌였다. 거시 이론을 앞세우는 좌파를 논파하기 위해 그 역시 치밀한 글쓰기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네티즌들의 검증 속에서 명망을 얻은 고수들이다 보니 나름의 ‘비기’(秘技)를 하나씩 갖고 있다. 환율 분석과 예측에 관한 한 ‘미네르바’는 지존의 경지에 오른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미 7월에 환율 폭등을 예견했고 나중에 그대로 들어맞았다. 전문가들조차도 ‘미네르바’가 인용하는 정보 수준을 최고 경지라고 평가한다.

“이건 아니다”라는 위기의식 공통점

‘헝그리울프’는 <블룸버그> <로이터>를 비롯해 국외 사이트에 뜬 한국 관련 뉴스들을 신속하게 토론방에 올리고 간단한 번역까지 해주며 명성을 얻고 있다. ‘양원석’은 일종의 지식중개인을 자처하고 있다. 그는 어려운 용어와 개념이 자주 출몰하는 경방고수들의 글을 초보자용으로 쉽게 풀어준다. 이를 위해 각종 사이트들을 뒤져 자신이 이해할 때까지 공부하고 있다.

» 경방고수 가운데 정부 발표를 쉽게 정리하기로 이름난 ‘상승미소’. 본명이 이명로인 그가 11월24일 다니는 회사에서 얼굴을 공개했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SDE’는 수학을 바탕으로 한 공학적 지식으로 거시경제 모델을 분석·예측하는 데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지난 7월 아고라 경제토론방에 ‘부동산 폭락론’을 제시했는데, 그 뒤 부동산 가치는 계속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상승미소’는 정부 정책의 의미와 효과를 정리하는 데 달인으로 손꼽힌다. 실물경제의 흐름을 잘 이해하면서 펀드나 주식 등 일반인들의 관심사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는 게 강점이다. “거시경제를 알리는 동시에 번 돈을 소중하게 관리하는 방법”을 일러주는 데 주안점을 둔다.

이런 모든 수고를 기꺼이 감수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흥미롭게도 이들은 모두 힘없는 서민과 공동체의 미래를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었다. ‘미네르바’가 “천민의 관점에 서야 한다”고 촉구한 대목을 연상시켰다. ‘SDE’는 인터넷에 왜 글을 쓰느냐는 질문에 “무엇보다 ‘이건 아니다’라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는 “이대로 가면 전 국민이 재앙을 입게 된다는 위기의식 때문에 글을 쓴다”고 했다.

‘명사십리’는 지난해 9월부터 경제 논객으로 활동했는데, 그 무렵부터 “경제 문제가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회사 인근 재래시장 상인들을 상대로 한국 경제의 위기 구조에 대한 ‘계몽작업’을 벌이고 있다. 당연히 자신에게 이문이 남는 일은 아니다. ‘상승미소’는 특별히 개인과 가족에 대한 관심이 많다. “경제 상황을 설명하면서 펀드나 주식에 투자할 때가 아니라고 해도 믿지 않더라고요. 신문에는 무조건 (증시에 투자해도) 된다고 기사가 나오니까, 더 그런 거죠.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글을 쓰게 됐어요.”

‘양원석’은 “경제 관련 서적 가운데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책은 한 권도 없다”고 말했다. 그로서는 경방고수의 글을 읽어내려가는 것 자체가 도전이다. 그러나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볼 사람들에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경방고수의 글을 소개하면 어떨까 싶었다”고 말했다. “그 간극을 내가 메웠다는 생각이 들 때의 뿌듯”한 맛 때문에 그는 작업을 멈출 수 없다.

“올해 초 미국·영국·인도 등 각국 정상의 신년사가 ‘미국발 위기의 파장이 올 테니 허리띠 매고 정신 단단히 차려야 한다’였는데, 정작 우리 대통령은 ‘주가 3천 간다’고 하더군요. 이거 큰일 나겠구나 싶었죠.” 동시통역사인 ‘헝그리울프’가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고라 경제방에 글을 올리는 것뿐이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활동

지난 7월 이후, 고급 정보와 치밀한 분석을 대중친화적 언어로 풀어쓰는 경방고수가 속속 등장하면서, 그동안 강호를 지배했던 경제관료나 학자, 애널리스트들은 한발 물러서 숨죽이고 있다. 암울한 전망을 그대로 내놓을 수 없는 ‘제도권’의 한계 때문에 이들의 은인자중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경방고수들은 내다봤다.

경제부처 공무원들은 조직 논리 때문에 정부 정책을 비판하지 못하고, 경제학 교수들은 학문적 위신 때문에 몸을 사리고, 언론은 주식이 잘돼야 광고가 잘되는 탓에 위기설을 숨긴다고 ‘헝그리울프’는 분석했다. 그는 현역 애널리스트 가운데 ‘미네르바’와 논쟁할 만한 경쟁력을 갖춘 이가 과연 얼마나 될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상승미소’는 “인터넷은 진짜 전문가를 키워내는 시장”이라며 “인터넷 덕분에 진짜 진실이 통하는 사회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방고수의 진정한 내공은 따로 있다. <한겨레21>과 만난 경방고수들은 미리 입이라도 맞춘 듯,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강조했다. ‘세상을 다스려 백성을 구한다’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본뜻을 살리는 글쓰기가 자신들이 몰두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마포강변’은 “결국 철학의 문제”라며 “경제라는 게 인간을 위한 것이고, 지금의 위기는 인간과 국가의 탐욕이 만들어낸 건데, 그걸 자제하지 않으면 공멸한다는 게 내 논리”라고 밝혔다. ‘SDE’도 “경제는 말 그대로 경세제민일 뿐 개인의 부귀와는 관련 없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양원석은 “중산층 이하 서민이 이 상황을 알고 생존의 방법을 찾고 새 패러다임을 찾는 걸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며 경방고수들의 작업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상승미소’는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사람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고 못박는다.

경방고수, 그들은 지금 인간 대신 자본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기존 경제학의 ‘매트릭스’에 파산선고를 내리려 하고 있다.

미네르바는 누굴까

“외환 전문가” 한목소리… 나이는 “70대” “30대” 갈려

리먼브러더스의 파산과 환율 급등을 적중시키며 ‘인터넷 경제 대통령’이라는 호칭까지 듣는 미네르바.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시대의 불확실성과 정권의 낮은 신뢰가 미네르바의 날개를 떠오르게 하는 양력이 됐듯, 오리무중에 갇힌 그의 정체는 시간이 갈수록 그를 더 신비화하고 있다.

그에 대한 정보가 처음 흘러나온 때는 11월12일. <매일경제>가 정보당국을 출처로 ‘미네르바는 50대로, 해외 경험이 있는 증권맨’이라고 보도했다. 이어 인터넷에 미네르바를 안다는 사람의 글이 뜨면서 이목을 집중시켰다. 미네르바의 글을 보면, 문체는 젊은이의 것이되 소재는 1950∼60년대 머슴살이까지 거론하고 있다. 자신의 연륜이 오래됐다는 걸 각인시키기 위한 장치다. 그는 마지막에 쓴 글에서도 “나… 그냥 노인네야…”라고 밝히고 있다.

외환과 관련한 정보의 깊이와 분석이 워낙 뛰어난 때문인지, 미네르바가 외환시장 계통에서 일하는 인물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그의 연령대는 여전히 물음표다. 경방고수 가운데 ‘명사십리’는 “생각이 깊어 인생을 오래 산 사람이 쓸 수 있는 글”이라는 근거와 함께 그의 나이가 70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업계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확인해본바, 그는 올해 31살로 외국계 금융사에서 일하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미네르바의 나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추정치는 할아버지와 그 손자 사이를 오가고 있는 셈이다.

미네르바는 11월18일 이후 인터넷에 글을 올리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그를 향한 우리 사회의 ‘숭배’는 멈출 기미가 없다. 그의 글들을 모아 볼 수 있는 ‘다음 아고라 미네르바 글모음’(cafe.daum.net/iomine) 카페는 아예 미네르바가 아고라에 올린 글들을 책으로 엮어 팔고 있다. 회원 수만 5만여 명에 이르는 이 카페의 카페지기는 11월27일 “개인이 인쇄하려면 한 쪽당 30∼40원이 들어,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인쇄를 하고 지인들에게 알리려는 취지로 책을 만들게 됐다”며 “지금까지 1800부 이상 팔렸는데, 내게 판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상업적으로 비칠 수 있다는 지적에 따라 이번달 말까지만 접수하고 인쇄는 그만하려 한다”고 말했다.

미네르바가 절필을 선언하면서 읽어보라고 추천한 단행본도 날개 돋친 듯 팔린다. 그중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리오 휴버먼 지음, 장상환 옮김)를 발행하는 출판사 책벌레 쪽은 “2000년에 처음 출판해 1년에 3천 부 정도 팔렸으나 (미네르바 추천 이후) 석 달 사이에 1만 부가 팔렸다”며 “11쇄까지 나왔었는데 그 사이에 14쇄까지 찍었다”고 말했다.

일반인들의 미네르바 열풍도 식을 줄 모른다. 경방고수 ‘헝그리울프’는 “아는 친구 회사에서는 여직원들이 미네르바의 글을 10번식 자필로 쓰는 운동을 한다더라”며 “정부 당국자들이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지점”이라고 지적했다.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경방고수’들의 한국 경제 전망

고통 2배 각오… 정부 실책 땐 공황 올 수도

‘그래도 그렇지, 경방고수라는 이들이 한국 경제에 대해 너무 비관적 전망만 내놓는 것 아냐?’ 당사자들은 이 물음에 “그것이 솔직한 진실”이라고 했다. 경방고수가 보는 한국 경제 예측, 그리고 그 근거를 들어봤다.

SDE: 정부는 20조원의 재정 지출이 100조원 정도의 지출 효과를 낼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은행에 대한 대출 강요와 금리 인하에 목매단 채권펀드 조성은 원화 하락만 부추길 뿐이다. 12월에 은행들의 외환 유동성 문제가 터질 가능성이 높다. 내년 1/4분기까지가 단기 바닥이다. 향후 전망은 은행의 예대율이 100% 밑으로 떨어질 것인가에 달려 있다. 추세적 하락 속도가 빠르면 엄청난 고통이 수반되는 동시에 공황에서 빠져나오는 시간은 앞당겨질 것이다. 반면 속도가 완만하면 고통은 경감되지만 공황은 길어질 것이다.

명사십리: 비관적이다. 대공황 차트를 분석한 결과, 대세 상승기 이후 내년에 대하락기가 있다. 주가 500선이다. 내년 11월 정도까지는 (위기를) 극복한다 하더라도 유가가 폭등하게 돼 있다. 우리가 받을 호재의 가능성도 있다. 아웃소싱이다. 반도체, 유전공학, 나노 분야, 태양에너지 등 기술을 갖추고 인건비가 미국보다 싼 일감들이 들어오면, 환율이 안정되면서 먼저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도 있다.

마포강변: 지금보다 50% 가난하게 살 생각을 해야 한다. 수출은 내년에 여전히 엉망진창일 것이고, 무역수지에서 흑자가 나도 자본수지는 적자가 날 것이다. “이 정도 고통이 올 것이다”라고 정부가 솔직히 얘기해야 한다. 결국 있는 사람들이 희생해야지 않겠나. 양극화가 심화되면 혁명에 준하는 사태가 날 수도 있다.

양원석: 정부가 빚을 빚으로 막으려 할수록 침체를 가져올 것이다. 대공황과 비슷한 상황이 올 가능성이 50% 이상이라고 본다. 단순한 경제위기라기보다는 중산층이 몰락할 것이다.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가상화 도입! 비싸잖아? 모르는 소리


전통주를 찾아서


< 조이뉴스24 >
계절은 이제 겨울이다. 겨울여행은 몸과 마음이 따뜻해지는 곳이 좋다. 이맘 때 어딘가 정감 넘치는 시골마을을 찾았다가 그 고장 전통주 한잔에 훈기가 온몸에 도는 것을 느낀다면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한국관광공사는 2008년 마지막 달인 오는 12월 가볼만한 곳으로 '전통주를 찾아서'란 테마를 중심으로 '경기 포천', '충남 서천', '전북 완주', '제주 서귀포' 4곳을 선정했다.



정성으로 빚어 세월을 담은 깊은 맛-완주 '송화백일주'

좋은 술의 기본은 좋은 물이다. 송화백일주는 전북 완주군 수왕사(水王寺) 약수로 빚는다.
송화백일주는 수도승들이 고산병 예방을 목적으로 즐겨 마셨다는 곡차(穀茶)에서 유례를 찾을 수 있다. 송화백일주는 송홧가루, 솔잎, 산수유, 구기자, 오미자, 찹쌀, 백미, 보리 등 다양한 재료로 빚은 밑술을 증류해 얻는 증류식 소주이다.

송홧가루의 황금빛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송화백일주는 38도라는 도수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목넘김이 부드럽고 소주지만 청주 같은 묵직함도 느껴진다. 은은한 솔향과 달짝지근한 뒷맛도 무척이나 매혹적이다.

뭔가 대단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 깊은 맛의 비법은 따로 있지 않다. 벽암스님의 말처럼 좋은 물과 좋은 재료를 이용해 정성껏 빚는 게 최선의 비법이다.

사실 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이기도 하다. 그 다음은 기다림이다. 세월을 거스르지 않는 기다림. 술 한 병을 빚는 데 꼬박 100일이 걸리고, 제 맛을 완성하기 위해 3년을 더 참아내야 하는 기다림 말이다. 완주군청 문화관광과 (063)240-4257


포천(抱川)에서 술과 함께 거닐다-'배상면주가'와 '이동막걸리'


경기도 포천으로 가는 길은 어디를 둘러봐도 온통 산뿐이다. 산이 좋으니 물 맑은 것은 당연지사. 예부터 음식의 맛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물이라 했다. 성분의 대부분이 물로 이루어진 술이야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그 물맛을 찾아 포천에 자리한 두 곳의 술 명가가 있다.

화현면 화현리 운악산(936m) 아래 자리한 배상면주가와 이동면 도평리 백운산(904m) 아래 자리한 이동막걸리이다.

배상면주가 전통술박물관 산사원은 주조도구를 전시한 전시장과 시음장, 가양주빚기체험장 등을 갖추고 있는 정갈한 술 문화 체험공간이다.

그에 반해 이동막걸리 양조장은 직접 들어가 술 빚는 과정을 볼 수 없지만 인근의 직판매장에서 도토리묵 손두부 등과 함께 효모가 살아있는 생막걸리 맛을 누려볼 수 있는 서민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밖에 한과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한가원, 화강암폐석산을 문화창작예술공간으로 재탄생시킨 아트밸리 등도 함께 돌아볼만한 공간이다. 포천시청 관광진흥팀 (031)538-2067~9


제주의 과거 속에서 술잔을 기울이다-제주 '오메기술'


제주에서 흔히 좁쌀막걸리로 불리는 오메기술을 제대로 즐기려면 서귀포 성읍민속마을에 가야한다.

무속신앙이 성행하던 옛 제주도에서 사시사철 당신(堂神)에게 제사를 드리며 따르던 술이 바로 오메기술로 14~17도 정도로 여느 막걸리와 도수가 비슷하나, 맛은 일반 막걸리보다 새콤달콤해 여성들이 즐기기에도 무난하다.

또 오메기술을 맑게 증류시킨 고소리술이 있다. 이 술은 40도가 넘어 1년 이상 장기보관이 가능하며 육지로도 판매되고 있다. 도수는 높지만 향과 맛이 순하고 부드러워 독한 술 같은 느낌이 들지 않으며, 술이 깬 다음에도 머리가 아프지 않고 숙취가 적다.

성읍민속마을을 관람하는 최적의 방법은 관리사무소를 방문, 전문 문화관광해설사의 동행을 요청하는 것이 좋은데, 30분이든 하루 종일이든 원하는 시간만큼 가능하다. 성읍민속마을보존회 (064)787-1179


달콤한 소곡주에 취하고 황금빛 갈대밭 데이트-서천 '소곡주'


술 익는 마을이 있고, 서걱대는 갈대숲을 거닐고, 떼 지어 날아오르는 철새들의 비상을 만날 수 있는 충남 서천은 명품 겨울여행지임에 틀림없다. 여기에 우리나라 전통주의 대명사로 손꼽히는 한산 소곡주를 곁들인다면 시공을 초월해서 신선이 어디 따로 있겠는가.

한산 소곡주는 1300년 전 백제왕실에서 즐겨 음용하던 술로 알려져 있다. 현존하는 한국 전통주 중 가장 오래된 술이 바로 소곡주다. 소곡주는 연한 미색이 나고 단맛이 돌면서 끈적거림이 있고 향취는 들국화에서 비롯된 그윽하고 독특한 향을 간직하고 있다.

술의 재료가 되는 잡곡의 냄새가 전혀 없는 최고급 찹쌀로 빚어 100일 동안 숙성시켜 만드는 전통곡주다. 소곡주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첫 번째가 물이요, 두 번째가 누룩, 세 번째가 술 익는 온도라고 했다.

소곡주에는 찹쌀과 누룩, 향을 위한 약간의 국화잎과 부정을 타지 말라는 의미로 홍고추 서너 개가 들어가는 것이 전부다.

좋은 술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한산 소곡주의 달콤함은 꽤 오래 혀 끝에 남아 솜사탕처럼 입안이 화해진다. 서천군청 문화관광과 (041)950-4224


/정은미기자 indiun@joynews24.com

공중파 업은 IPTV, 방송계 '핵폭탄' 될까


 기사입력 2008-11-17 17:35 기사원문보기

▲ 17일 방송을 시작한 KT의 메가티브이 홈피 메인화면 공중파 재전송이라는 필수카드를 달았고, 영화 등도 공급해 쌍방향 시대의 진정한 시작을 알린다
ⓒ 조창완

KT가 17일 실시간 IPTV 서비스인 '메가TV 라이브'를 출시했다. 그 동안 말로만 있었던 쌍방향 콘텐츠 서비스가 사실상의 첫 행보를 내딛은 셈이다. 물론 그동안 이 서비스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간 IPTV는 공중파방송의 재전송이 불가능했다. 아직까지 절대적인 시청률을 차지하는 공중파를 볼 수 없는 IPTV는 사실상의 무용지물에 가까웠다. 그런데  IPTV가 공중파라는 무기를 장착하고 소비자를 공략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에 가장 많이 노출되는 CF인 SK의 '브로드밴드'와 다음달에 서비스를 시작하는 LG데이콤이 IPTV의 삼두마차다.

IPTV는 과연 위성방송처럼 찻잔의 태풍으로 끝날 것인가. 아니면 방송산업구조에 핵폭탄이 될 것인가. 기자는 후자라고 확신한다. IPTV의 뒤에 한국방송광고공사의 폐지라는 촉매제가 있기에 그런 가능성은 더 커진다.

이런 확신은 2년 뒤에 있을 한국방송광고공사(KOBACO 이하 코바코)의 방송광고 독점 영업체계 변경이 있기에 가능하다. 현재 방송광고 대행의 역할이자 조절자의 역할을 하는 코바코는 미디어렙으로 바뀌고 다른 방송광고 대행업체도 생겨서 경쟁체제가 된다. 그럴 경우 광고주들의 자율성이 강화되어 광고시장의 위축이나 매체간 광고흐름의 격변이 예상된다.

원할 때 필요한 프로그램 볼 수 있는 IPTV, 방송계의 핵폭탄

얼핏 먼 것 같은 이 두 변화는 사실 우리 언론계의 현 지반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대형폭탄이다. 이 체계가 정착될 4년 후를 상상해 보자.

한 중견기업 광고업무를 담당하는 마흔살 영재씨는 아침에 출근하면서 핸드폰으로 어제 놓친 드라마의 전반부를 봤다. 영재씨가 이용하는 통신사는 IPTV와 이동전화영상서비스를 연동해 VOD(주문자형 비디오서비스)를 제공한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집에서는 케이블TV를 이용했는데 광고가 없어서 시간을 줄이는 이 서비스를 이용한다.

케이블TV는 주문형 서비스를 받을 수 없었다. 반면에 대형 통신사들이 서비스하는 IPTV는 주문형 영상은 물론이고 이동전화, 인터넷 등 모든 커뮤니케이션의 토탈 서비스를 제공했다. 각 서비스를 별도로 이용하면 비쌌지만, 한 회사의 서비스를 한꺼번에 이용할 경우 패키지 가격이 있어서 저렴했다. 맞벌이를 하는 아내도 영어공부를 한다고 IPTV의 영어 교육을 원했고, 아이도 원하는 만화를 주문해서 볼 수 있어야만 오락 시간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오전에는 공중파인 KMS 방송의 영업 담당자가 찾아왔다. 새로 시작하는 주말 드라마 시간에 있는 광고를 사달라는 것이었다. 5년 전만 해도 인기 드라마의 광고시간을 사기 위해서는 시청률이 낮은 시간대의 광고를 같이 사는 끼워팔기 등도 있었지만 이제 그런 일이 없어진 지 오래다. 또 코바코의 독점체제가 폐지되면서 전체 광고비 지출에 대한 부담도 줄었다. 광고를 보지 않아도 되는  IPTV가 확산되면서 공중파의 광고효과도 이제 거의 없다. 대신에 PPL(상표노출방식) 광고나 인터넷 광고의 효과가 늘어나고 있다. 공중파 담당자에게는 일단 상반기 집행 결정을 한 후 소식을 주겠다고 돌려보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기자의 상상일까 아니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반적인 모습일까. 5년 후 우리나라 방송의 시청 방식을 생각해보자. 현재 절대적인 시청자 망을 보유한 케이블TV와 위성방송 스카이라이프 및 새로운 진입자 IPTV가 삼자구도를 이룰 것이다. 세 매체의 콘텐츠는 거의 차이가 없다면 시청자는 무엇을 선택할까. 주문형 비디오서비스가 가능한 IPTV를 선택하지 않을까.

홍콩, 서비스 3년만에 IPTV 보급률 45%... 케이블·위성TV 넘어서

▲ 홍콩 나우티브이 메인 나우티브이도 다양한 콘텐츠와 주문자형 서비스로 빠른 시간에 케이블 시장을 점령했다
ⓒ 조창완

사람들은 의심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에 스카이라이프 등이 나왔지만 케이블TV의 선호도는 떨어지지 않았다. IPTV가 그렇게 영향력이 있을 것인가. 이 답안은 우리보다 먼저 IPTV를 실시한 홍콩의 경우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홍콩의 경우 2007년 IPTV가 케이블 TV 가입자수를 넘었다. 2007년 홍콩의 IPTV 가정 보급률은 45.3%로 케이블이 41%, 위성DTH (direct-to-home) 서비스가 나머지 12.3%를 점유하고 있다. 출범 3년만에 IPTV가 케이블 TV를 이긴 것이다.

원동력은 소비자에 맞는 콘텐츠 개발도 있지만 무엇보다 홍콩인들의 생활 패턴이다. 바쁜 오피스맨들이나 상인들이 많은 홍콩에서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IPTV의 성공을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또 상대적으로 도시의 밀집도가 높아 네트워크 사업비와 마케팅이 쉬웠다는 점이 있다. 반면에 2006년 서비스를 시작한 중국은 아직 제대로 걸음마를 뛰지도 못하고 있다. 거의 독점적 지위를 가진 차이나텔레콤은 이동전화에 더 깊은 열정을 갖고 있고, 지역도 넓을 뿐만 아니라 유료 소비층 등도 얇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국내 최대 능력을 가진 KT, SK, LG의 삼두마차가 수도권 등 최대 집적도를 가진 시장에서, 이동전화, 인터넷 서비스 등의 기존 시장을 가진 채로 수십개로 분할된 케이블TV를 상대로 해서 일대 격전을 벌일 것이다. 몇 개의 MSO(다소유 케이블업자)가 있다지만 VOD 등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상태에서 거대한 통신기업을 상대로 한 총성없는 전쟁을 과연 원만히 치러낼 수 있을까. 기존에 케이블TV는 한 가입자당 10만원에 가까운 가격으로 인수되는 호시절을 지냈다. 과연 이런 영화는 IPTV 시대에도 계속될 것인가.

IPTV 전송망 중복투자는 낭비, 국가가 조율해야

IPTV의 부각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기존 케이블TV 업자들을 어떻게 보호해줄 수 있는가와 낭비없는 시스템 구축이다. 또 새로운 패러다임에 맞는 콘텐츠 확보와 발전을 어떻게 유도할 수 있는가도 빼놓을 수 없는 문제다.

실제로 현행 방송법상 MSO가 77개 방송권역 가운데 15개(5분의 1) 이상 소유하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있다. 이 경우 15개의 권역을 소유한 MSO가 최대한 확보할 수 있는 가입자는 300만명 정도다. 반면에 IPTV 사업자는 전체 유료방송 가입자 1700만 명중에 33%인, 550만 명까지 확보할 수 있다. 103개 케이블TV 종합유선방송국(SO)의 총매출이 2조 1300억원인데 반해 매출 12조의 KT를 비롯해 SK브로드밴드(1조 8682억원), LG데이콤(1조 3530억원)과 싸우는 것은 케이블TV에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귀중한 전송망의 중복투자도 빼놓을 수 없는 문제다. 현재 IPTV를 위해서는 1가구 1TV를 기준으로 할 때 최소 16M 이상은 되어야 IPTV 서비스를 원활히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3사는 09년 6040억원, 2010년 7683억원 등을 투입할 계획이다. 결국 세 업자가 동일한 방식으로 망에 돈을 쏟아붓는 꼴이다. 이미 케이블TV업자들이 디지터방송을 위해 돈을 쏟아부은 곳에 다시 투자하는 것이어서 국가 차원의 조율이 절실하다.

▲ 나우티브이의 컴퓨터 버전 iptv는 빠르게 방송과 통신의 융합을 가져오는 매체다. 사진은 나우티브이가 피시에 설치된 모습
ⓒ 조창완

가장 큰 문제는 방송발전의 가장 큰 요소인 콘텐츠의 확보 문제다. 현재까지 시청자들에게 콘텐츠로 영향력이 있는 곳은 공중파 방송사들이다. 하지만 공중파가 가진 콘텐츠 주도력은 갈수록 위협받고 있다. 드라마를 비롯해 중요한 콘텐츠는 이미 아웃소싱 받는 게 대부분이다. 지금까지는 방영권을 바탕으로 방송광고를 받을 수 있었지만 코바코의 폐지와 광고시장의 급속한 위축은 이런 어려움을 가중시킬 전망이다.

또 VOD 시장의 확대는 방영권 자체의 위력을 약화시킨다. 방송사들은 드라마는 물론이고 제작비가 많이 드는 정보 프로그램까지 폐지하면서 다이어트에 나서고 있지만 총체적인 시장 감소 속에서 내년 예산 계획을 세울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기존 콘텐츠 시장의 강자인 공중파들도 일개 PP(프로그램 공급업자)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 문제다.

기존 공중파들은 생산물에 비해 지나치게 비대한 비용 문제를 안고 있어 콘텐츠 생산 능력에 문제를 안고 있다, 반면에 온미디어나 CJ미디어 등 대기업이 운영하는 PP들은 시청률 위주의 저렴한 방송 콘텐츠 제작망을 갖고 있어 상대적으로 유리할 전망이다.

반면에 격전장에서 가장 여유로운 것은 대기업 위주로 되어 있는 광고주들이다. 이전처럼 여러 가지 발전기금이 있는 방송 광고를 사지 않아도 된다. 이전보다 더 강하게 광고를 가지고 방송사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구조가 됐다.

[오마이뉴스 조창완 기자]
[☞ 오마이 블로그] [☞ 오마이뉴스E 바로가기]

[포토] 쓸 만한 '프리 SW' 10선


[지디넷코리아] 어려운 경제상황 속에서 해적판 소프트웨어의 유혹을 이기고 쓸 만한 프리 소프트웨어(SW)에 눈을 돌려보는 것이 어떨까. 씨넷은 윈도 이용자를 대상으로 편리한 프리 SW를 소개했다.

프리 SW: OpenOffice.org

대체 대상: MS 오피스(홈에디션)

절약 금액: 150달러

◇사진설명: 최신 MS 오피스에 아직 업그레이드하지 않았다면, OpenOffice.org에 도전해 보자. 친숙한 인터페이스의 이 애플리케이션은 기억하기 쉽고 오피스의 주요기능과 같은 기능을 쓸 수 있다. 텍스트 문서, 스프레드시트, 프레젠테이션, 데이터베이스, 그림을 작성 및 편집할 수 있다. 또 템플릿이나 통합 툴을 탑재해 매크로도 지원한다. 파일 내용을 ‘구글독스’에 옮길 수 있고 MS 오피스 문서와도 호환이 가능하므로 다른 사람과 주고받는 데도 별 문제가 없다.

프리 SW: GIMP

대체 대상: 어도비 포토샵

절약 금액: 100달러

◇사진설명: GIMP는 감탄할 만하다. 레이어를 지원하므로 색이나 곡선, 밸런스를 보정하는 등 충실한 툴킷이 준비돼 있다. 일부 프리 SW의 사진 편집 애플리케이션과 달리 GIMP에서는 효과적인 적목현상 제거필터 등도 탑재했다. 친절한 매뉴얼이 편집 작업을 도와주며, ‘GIMPshop’ 플러그인을 도입할 경우 어도비포토샵 용어에 맞춰 일부 기능의 명칭까지도 바뀐다. 다만 ‘어도비 포토샵 엘리먼츠’처럼 슬라이드쇼는 작성할 수 없다. 하지만 이때 ‘IrfanView’를 사용해 기본적인 슬라이드 쇼를 무료로 작성하고 웹 애플리케이션 ‘SlideRocket’으로 완성하면 간단히 공유할 수 있다.

프리 SW: KompoZer, Inkscape, PrimoPDF, Synfig Studio, Jahshanka

대체 대상: 어도비 크리에이티브 스위트

절약 금액: 200~2천달러

◇사진설명: ‘어도비 크리에이티브 스위트 3(CS3)’의 많은 작업을 프리 SW로 할 수 있다.

프리 SW: AVG Anti-Virus Free Edition, Avira AntiVir Personal Free Antivirus

대체 대상: 맥아피, 노턴, 카스퍼스키

절약 금액: 40달러

◇사진설명: 프리 안티바이러스 SW인 ‘AVG 안티바이러스 프리 에디션’과 ‘에이비라 안티버 퍼스널 프리 안티바이러스’는 유료 애플리케이션에 가장 가까운 기능을 제공한다. ‘AVG 안티바이러스 프리 에디션’은 빈번한 업데이트, 스케줄 스캔 및 실시간 보호를 제공한다. 또 의심스러운 파일이나 프로세스를 격리해 검색 결과의 안전성을 평가한다. ‘에이비라 안티버 퍼스널 프리 안티바이러스’도 바이러스 정의 파일에 합치하는 파일이 없는지 스캔을 실시한다. 또한 대부분의 프리 보안 SW와 달리 루트킷을 검색한다. 에이비라 역시 기능은 좋지만 광고가 많고 속도가 느린 편이다.

프리 SW: CamStudio

대체 대상: 캠타시아 스튜디오(Camtasia Studio)

절약 금액: 300달러

◇사진설명: ‘캠스튜디오’는 장시간 촬영은 어렵지만 이용자가 끈기가 있다면 질 높은 스크린 동영상을 AVI 형식이나 SWF 형식에서 녹화할 수 있다. 베타버전에는 아직 버그가 있어 다양한 옵션 설정이 필요하지만, 기본 데모 작성에는 문제가 없다.

프리 SW: Gadwin PrintScreen

대체 대상: 스내그잇(SnagIt) 9

절약 금액: 50달러

◇사진설명: ‘Gadwin PrintScreen’은 캡처 후의 화면을 보존 및 처리하기 위한 커스터마이즈 설정이 풍부하게 준비돼 있다. 화면을 클립보드에 보존하고 인쇄할 수 있으며 자동으로 파일에 이름을 붙일 수도 있다.

프리 SW: 7-Zip

대체 대상: WinRAR, WinZip

절약 금액: 30달러

◇사진설명: 완전 무료인 ‘7-Zip’은 파일을 RAR, ISO, MSI를 포함한 압축 포맷을 해제할 수 있다. 또 ZIP, TAR, GZIP 파일도 압축할 수 있다. TAR와 GZIP는 리눅스와 유닉스 시스템으로 잘 볼 수 있으며 주요 시판 애플리케이션에서는 지원하지 않는 파일 타입이다. 7-Zip 자체의 크기를 더욱 작게 하고 싶다면 휴대용 버전을 시험해 보자.

프리 SW: IOBit Smart Defrag

대체 대상: 디스크키퍼(Diskeeper)

절약 금액: 30달러

◇사진설명: ‘디스크키퍼’처럼 유효상태에서도 사용할 수 있고 퍼포먼스도 안정돼 사양이 높지 않은 기기에서도 사용 가능하다. ‘Smart Defrag’의 스케줄러를 사용하고 야간에 defrag를 실행하도록 설정하면 종료 후 컴퓨터 전원을 꺼 준다.

프리 SW: BurnAware Free, Ashampoo Burning Studio Free

대체 대상: 네로

절약 금액: 80달러

◇사진설명: 단지 데이터를 디스크에 보존하고 싶은 경우라면, 비디오 편집이나 슬라이드 쇼를 위한 SW인 ‘네로’ 없이도 CD, DVD, 블루레이에 데이터를 보존하는 기본 기능을 탑재한 ‘아샴푸 버닝 스튜디오 프리’나 ‘번어웨어 프리’로 충분하다.

프리 SW: Windows Live FolderShare

대체 대상: 슈가싱크(SugarSync)

절약 금액: 25달러 이상

◇사진설명: 크기가 2GB 이하로 제한되고 있지만 폴더셰어(FolderShare)에서도 윈도나 맥 플랫폼에서 파일을 동기화할 수 있다. 데스크톱 클라이언트뿐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폴더셰어’에 접속할 수 있다.


Jessica Dolcourt(CNET News)=정리, 박효정 기자

[심재희의 골라인] FC 서울, 아스날을 닮았다!


[심재희의 골라인] FC 서울, 아스날을 닮았다!

지난 29일. FC 서울이 수원과의 라이벌전에서 짜릿한 승리를 거두고 정규리그 우승을 위한 7부능선을 넘어섰다. 리그 19경기 연속무패(11승 8무) 행진. '난공불락'이라는 말이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이제 남은 두 경기에서 1승 1무 이상의 성적을 기록하면 자력우승을 확정지을 수 있다.

이날 후반 45분에 결승골을 기록한 기성용은 어디서 본 듯한 세리머니를 펼쳐 눈길을 모았다. " 엠마누엘 아데바요르를 좋아하는데, 그 선수의 세리머니를 따라해봤다. " 아스날의 토고 출신 스트라이커 아데바요르. 기성용은 아무런 의미없는 '따라하기'였다고 했지만, 우연하게도 필자는 다시 한 번 이전부터 생각해왔던 서울과 아스날의 닮은꼴 모습을 떠올리게 됐다.

아스날과 서울의 가장 큰 공통점은 바로 '컴팩트함'이다. 두 팀 모두 수비-허리-공격의 간격을 좁히고, 짧은 패스를 기본으로 경기를 진행하는 모습을 많이 보인다. 중원부터 적극적인 압박을 가하면서 패스워크를 주무기로 하다보니 경기 자체에 아기자기한 맛이 있으며, 이는 많은 팬을 확보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되고 있다. 아스날의 아르센 벵거 감독은 스타급 선수들과 유망주들을 잘 융화시키며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가장 아름다운 축구를 구사하는 팀을 만들었다. 세뇰 귀네슈 감독 역시 기존 K리그에서 볼 수 없었던 '빠른 템포'를 서울의 것으로 만들며 성공시대를 열고 있다.

다음으로, 아스날과 서울은 '젊음'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벵거 감독의 별명은 '유망주 수집가.' 탁월한 안목으로 유망주들을 영입해 스타로 키워내는 '스타-메이커'다. 그가 길러낸 테오 월콧과 세스크 파브레가스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팀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고, 아론 램지와 잭 윌셔 등 '내일의 스타'들이 계속해서 스타 대기표를 받아들고 있다. 귀네슈 감독 역시 어린 선수들을 잠재력을 깨워내며 팀을 더욱 강하게 만들고 있다. '쌍용' 이청용과 기성용은 이미 서울을 넘어 국가대표팀에서도 기둥으로 자리를 잡았고, 이승렬과 이상협 등도 선배들과의 선의경쟁을 통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다.

컴팩트함과 젊음을 동시에 갖춘 두 팀은 '보이지 않는 힘'을 바탕으로 강팀으로 거듭나고 있다. 스타급 선수들에 의존하지 않고 팀 전체가 톱니바퀴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인다는 뜻이다. 실제로 아스날은 '킹' 티에리 앙리가 떠났고 토마스 로시츠키와 에두아르도 다 실바가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경기력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다. 서울 역시 박주영의 이적과 정조국, 김은중 등의 부상공백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으며 리그 우승에 한발짝 더 다가섰다. 스타급 선수들이 빠졌을 때, 위기를 예상하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리듬과 템포, 그리고 전술과 전략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다른 선수들이 들어가도 그들의 보이지 않는 힘은 여전히 100% 충전상태로 유지됐다.

다른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축구 역시 결과가 중요시된다. 하지만 '알맹이 없는 승리'에는 손가락질을 할 정도로 축구팬들의 눈은 날카롭다. 만약 아스날이 아스날답지 못한 플레이로 승리를 한다면, 박수보다는 비난의 여론이 우세할 것이다. 축구팬들이 서울을 향해 박수를 치는 이유. 바로 팬들을 끌어모으는 '서울다운' 플레이와 함께 결실을 맺어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심재희의 골라인

한국축구를 사랑하는 청년입니다. 때로는 쓴소리도 과감하게 내뱉습니다. 솔직하게 한국축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대한민국 축구 파이팅입니다!

<獨 수용소서 키운 사랑..17년만에 뉴욕서 백년가약>

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8.10.14 11:10

(노스마이애미비치 < 美 플로리다주 > AP=연합뉴스)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 수용소 철조망 사이로 만났던 10대들이 17년 만에 미국에서 재결합해 결혼에 골인했던 사연이 훈훈한 감동을 주고 있다.

화제의 주인공은 미국 플로리다 바닷가에 사는 헤르만 로젠블라트(79)와 로마 라치키(76) 부부.

이들의 운명적 만남은 로젠블라트가 독일의 슐리벤 강제수용소에 수용됐던 194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발진티푸스로 아버지를 여읜 로젠블라트는 가족과도 생이별해 수용소에서 매일같이 페인트칠 등 고된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어느 날 철조망 담 앞에서 쉬고 있던 12세 소년 로젠블라트와 로마의 눈길이 마주쳤고 로마는 손에 들고 있던 사과를 담 너머로 던졌다. 로젠블라트의 외모에 한눈에 반해버린 것이었다.

인근 농장에서 일하던 로마는 이후에 수개월 동안 매일같이 철조망 앞에 나타나 로젠블라트를 향해 사과를 건네줬다.

이들은 당시에는 서로 이름도 몰랐고 감시원에게 발각될까 두려워한 나머지 한마디 말도 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로젠블라트가 악명 높은 체코소재 테레지엔슈타트 강제수용소로 이송되면서 이들의 만남은 종지부를 찍었다.

죽음의 위기에 몰렸던 로젠블라트는 탱크를 앞세운 소련군이 진격해 강제수용소를 해체하면서 살아남았다.

전쟁이 끝나고 로젠블라트는 영국 런던에서 TV 수선기술을 익혔고 로마는 이스라엘로 이주해 간호사 수업을 받았다.

그리고 몇년 뒤 미국 뉴욕으로 이주한 로젠블라트는 어느 날 소개팅 장소에서 만난 여성에게 자신의 전쟁 경험담을 털어놨고 대화 과정에서 상대방이 바로 매일 사과를 던져준 장본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날 밤 그는 로마에게 청혼했고 1958년 뉴욕시내의 한 유대 교회에서 백년가약을 맺었다.

로젠블라트는 자신의 사랑을 소재로 한 '천사소녀'(Angel Girl) 라는 제목의 동화책을 출간했고 내년에는 '철조망의 꽃'(The Flower of the Fence)이라는 제목으로 자서전을 발간하고 영화도 만들 예정이다.

khmoon@yna.co.kr

복돌이


 
 
 
 우리 집에 온지 9개월된 리트리버.
다리가 짧고 몸이 비만 이었던 놈을 산으로 데리고 다니며
훈련(?)시키고  난뒤 요즘은 나렵해졌다.
그리고 도둑 고양이가 울때면 일뛰고 저리뛰며
짖어된다.

신민아의 우아한모습





 


 


만추(滿秋)

가을을 느끼고 싶은 마음에 도봉산을 찾았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풀과 나무들은 초록의 색깔을 띠고 있다 .
그래서 찾은 곳은 벼이삭이 익어가는 모습을 볼수 있는 곳으로 향했다.


무수골들어서기 전에 한눈에 들온 도봉산의 전경(점봇대가 눈에 거슬려 약간의 포샾)




도봉산을 뒤로한채 무수골로 향하자 이번엔 북한산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도봉동 (도봉초교)에서 첫번째 다리를 지나고  무수골을 알리는 푯말과함께 두번째 다리를 만났다.



무수교위에서 바라본 무수골 모습.

아직까지 오염이 되지않은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무수교를 지나자 주말 농장이 눈에 들어왔다.(안내판에는 서울시 지정 우수농장이라고 쓰여있었음)
주말농장 위로 북한산 모습.


주말농장에 꼽힌 표지판.

농장을 임대해 채소를 가꾸고 관리하고 수확 할수 있다. 
주말농장 옆으로는 농장주의 비닐 하우스가 있다.


주말 농장을 지나고 세번째 다리와함께 내가 찾던 무수골이 보인다.


무수골에 들어서자 한사람이 긴 장대를 가지고 밤을 따고 있었다.
이곳 주민인가?



이사람 말고도 할아버지 와 할머니 한 분도 낙시대를 이용해 밤을 따고 있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장대로 흛은 밤은 주어 담고 있었다.(예전에는 이곳을 밤나무골로도 불렸었다)


나중에 안사실이지만 이 남자는 이곳(무수골) 사람이 아니고 도봉동에서 놀러 온 사람이였다.
밤을 따는 사람아으로 익어가는 벼 이삭들이 가을이 왔음을 알리고 있다. 


벼이삭도 알알이 영글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도시에서는 이제 보기 조차 힘들어진 논에 핀 쌀나무(?)  벼이삭.
 그것을 볼수 있는 이곳이 좋아 봄·가을이면 이곳을 찾는다.
얼마뒤면 이 벼들도 노랗게 황금색으로 변하고 그렇게 변한 벼들의 추수가 끝나면 가을도 깊어 지겠지.


무수골의 끝이자 도봉산 시작을 알리는 지도. 

도봉산 입구를 알리는 이정표를 뒤로 한채 되돌아 나왔다.

그레고리 존 리처드 콜버트의 작품들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에서 시작해 사진 작가로 그 활동 범위를 넓힌 Gregory Colbert는 13년 동안 이집트, 인도, 버마, 스리랑카, 에티오피아, 나이비아, 탕가 등 31개국을 여행하면서 코끼리, 고래, 해우, 팔콘 등이 인간과 교류하고 교감하는 모습을 필름과 사진으로 담아 Ashes and snow라는 제목으로 2002년 이태리 베니스에서 가장 큰 개인전을 열면서 세계적으로 인정 받게 되었다.
 





































과꽃















무덥고 어느해 보다 가물었던 여름이 지나고 꽃이 피었다.
작년에 피었던 꽃에서 씨앗을 받아 그해 가을 화분에 뿌렸었다.
 봄에 싹도 나지도 않고 아무런 변화가 없어 잊고 지냈었는데,
하나둘 싹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새싹들을 다시 여러 화분에다가 옮겨심었다.
그리고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시작될 무렵 꽃대이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아름다운 꽃을 피었다.
참으로 생명이란 위대 한것같다. 정성을 다해 가꿨었던 꽃들은 죽거나  피지않았고,
무심하게 보앗던 저 꽃들은 끝까지 살아 남아 아름다운꽃으로 내게 기쁨을 주니말이다.

Don McCrae 3



Angouleme III

Rooftops of St Emilion
 
Angouleme Rooftops II

Au Fil de l'eau - Brantome

Bordeaux Buildings

Don McCrae 2


Angouleme I

Angouleme II
  
Angouleme III

Angouleme Rooftops

Kings Parade, Cambridge, UK

Don McCrae 1


Red Door and Vine

Market Place, Aubeterre, Charente, France


La Dronne at Brantome, Dordogne, France

Patio Garden

Poppy Field near Abington, Cambridge, UK


출처: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  |  글쓴이 : 조아리엘 원글보기

도올의 포효... 가슴이 저립니다


도올의 포효... 가슴이 저립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가 내 나라가 아니라고 생각해봐요.
그러니까 그 비극이라고 하는 건 말할 수가 없는 비극이예요.
거기서 생겨난 모오~든 악습과 악폐.
일제 식민지는 우리 민족으로부터 모든 공공의식을 뺏아갔어요.

무슨 얘기냐면,
이게 내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그저 내가 사는 집 울타리만 생각하는 거예요.

이 울타리만 벗어나면 뭐예요?
남의 나라고, 순사가, 일본 순사가 댕기는 곳이예요.
모든 공공적 가치에 대한 인식을 뺏아가 버렸다고.

내 나라가 아니니까.

공공의 나라가 없어요.
공공의 장소가 없어요.

그러니깐 조선 왕조의 문벌주의, 이런 귀족주의, 양반 지배구조가, 뭐냐면,
일제시대 때 아주 옹졸한 가족주의로 응결이 된 거예요.

그래 가지고 이러한, 일제시대 때 이러한 악랄한 폐습이,
해방후..


해방 웃기네?
언제 우리가 해방을 맞이했어요?
우린 해방은 없었어요.



왜?
해방이라는 건 우리가 우리 힘으로 쟁취했을 때만이 해방이예요.

아시겠습니까?
8.15 해방은 해방이 아니예요, 그거는.
그냥 우연히 주어진거예요, 그냥!

우리는 해방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다시 우리는, 제국주의의 밑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우리나라 역사에서,
여러분 아셔야 되는 건,
단군 이래, 이승만처럼 막강한 왕은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항거하는 모든 사람을 다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그러한 비극적인 역사 속에서 그것이 군사독재로 이어졌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우리 역사에 내재적인 요소로 만연돼있는 겁니다.


이건 너무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고,
여기에 금권이 결탁하고 정치가 결탁하고 모든 만연된 부패가 있어요.
이 부패에 대해서 우린 모두가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국민은 최소한,
그러나 우리 국민이 이제는 뭐냐하면은,
이렇게 만연된 6백 년의, 6백 년의 유교 혁명이 일으켜놓은 이러한 패러다임을
근원적으로 변화시키지 않는 한,
우리 민족의 미래는 없다고 하는, 그러한 인식에,
모든 사람들이 지금 합의하고 있는거예요.